정월대보름 귀밝이술(耳明酒) 대보름이 다가오면 엄동설한에 움츠렸던 마을이 소란해졌다. 사내아이들은 깡통 바닥에 망치로 못을 두드려 구멍을 내고 양쪽 귀퉁이에 철사를 매달아 어스름 저녁부터 불기둥을 돌리며 논두렁을 쏘다녔다. 할머니는 부럼으로 땅콩과 콩을 볶고, 광에 놓아둔 술독에서 술을 떠놓으셨다.
집집마다 가을 내 말려두었던 호박, 토란대, 고구마순을 불렸다가 고소한 들기름에 묵나물을 볶고, 콩, 수수, 팥, 돈부콩 등을 골라 찰밥을 쪘다. 옆집 삼촌은 우스꽝스런 화장을 하고 배꼽이 드러나게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춤을 추며 풍물패를 이끌고 집집마다 나물밥을 얻으러 다녔다.
멀리 윗동네서부터 풍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굿패들이 이집 저집을 지나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할머니는 술과 안주를 꺼내오셨다.
“대동리떡 술 한 잔 먹었응게 귓병은 썩 물러가고 일 년 내동 좋은 소리만 들어보세~!” 술 한 잔에 동네 아저씨들이 치는 꽹과리, 장구 소리는 더 신명났고 대보름 달빛이 가득 들어찬 마당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정월대보름(음력 1.15)은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맞이하는 첫 번째 만월로 농경사회에서 설, 추석과 함께 풍요를 기원하는 큰 명절이다. 1년 365일 매일같이 떠오르는 달 중 가장 크고, 가장 둥글고 환하게 뜨는 달을 보고 풍년을 비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24절기 총 192개의 세시풍속 가운데 대보름날의 세시풍속이 55개로 가장 많다.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더위팔기, 오곡밥과 부럼, 귀밝이술 등 우리에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풍습이 적지 않다.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홍석모, 1849)」에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귀밝이술에 대해 쓰여 있다.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차가운 청주를 조금씩 마시는데, 이러면 귓병에 걸리지 않고 귀가 밝아지며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하여 이명주(耳明酒)라고도 부른다.
설날(1.1) 도소주(屠蘇酒:도소주(屠蘇酒)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술’이란 뜻으로, 약재 주머니를 섣달그믐에 동네 우물에 넣었다가 새해 첫날 그 우물물을 떠 술과 끓여 마시면 1년 내내 병이 없다고 하여 설날 아침에 마시던 세시주.)삼짇날(3.3) 진달래주, 단오날(5.5) 창포주, 중양절(9.9) 국화주처럼 특별한 재료나 정해진 주방문(술 빚는 법)없이 평소 빚어두었던 맑은 술을 차갑게 조금씩 마시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조상들에게 술은 마시고 취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건강과 복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자 하는 치유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겨우내 움츠러든 활기를 되찾기 위해 55가지나 되는 놀이와 행위가 전국 팔도에서 벌어지고, 한해 좋은 말만 들으라는 기원으로 귀밝이술을 마시던 대보름날의 세시풍속은 튼튼한 몸과 마음으로 마을 공동체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가자는 모두의 다짐처럼 보인다.
이제 고향의 대보름은 적막하고, 나는 기억 속의 그 소란했던 날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지만 텅 빈 고향을 생각하면 쓸쓸하다. 젊은 귀농귀촌인들이 많은 우리 고장 완주에서 휘영청 대보름달 뜬 밤하늘 위로 그 떠들썩함이 퍼져나가는 마을이 있다면 기꺼이 그 곳에서 귀밝이술 한 잔 마셔보고 싶다.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