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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15.03.10

더불어숲

자발적 잉여와 ‘팹랩’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15.03.10 20:12 조회 5,32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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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剩餘)라고 부른다고 한다. 잉여의 사전적 뜻은 ‘다 쓰고 남은 나머지’인데 1958년 손창섭은 단편소설인 「잉여인간」에서 6·25이후 현실과 조응하지 못하고 불구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잉여로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요즘 잉여라는 말은 사회 변화와 발전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부정적이고 자학적 의미도 있지만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체제에 편입하지 않고 개성과 창의성을 가지고 자기 생활을 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해서 그렇게 사는 다른 사람을 은근히 동경할 때 쓰기도 한다.

그래서 서울의 지하철에서 내 앞의 청년들이 ‘나 오늘은 잉여로 지낼 거야’ 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었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머지로 남는 것이 아닌 아예 처음부터 나머지가 되겠다는 ‘자발적 잉여’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 공부를 해봐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대학에서 공부를 해도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고 직장을 구해도 평생 다닐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직장을 다녀봐야 집 한 채 장만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매 순간마다 잉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언제 잉여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사느니 처음부터 잉여로 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년들의 생각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청년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어떤 일을 해야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 잉여들이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드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아내고 있다고 한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돈을 주고 해결하려면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면 잉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어 쓰고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 나누고 이미 만들어본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 가르쳐주는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아마 최근 도시농업이 활발해지고 농촌으로 귀농이나 귀촌하겠다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전세계적인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제작하는 생활양식과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이 바로 팹랩(Fab Lab, Fabrication Laboratory의 약자)이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제작실험실 정도가 되는데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시설, 장비, 공구 등을 갖추어놓고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볼 수 있고 다양한 기술적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미 전 세계 36개 국가에서 130여개의 팹랩이 만들어져 활용되고 있고 3D프린터의 보급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물론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창의적 기술개발을 위해서 운영하고 있는 팹랩도 있지만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지역사회의 청년들의 창업을 돕는 실험실로서 운영되고 있는 팹랩도 있다.

얼마 전에 서울의 청년들이 유럽에서 운영되고 있는 이러한 팹랩들을 돌아보고 사진을 모아 발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크지 않는 공간에 교류와 소통을 위한 작은 카페와 목공소, 철공소, 제봉소 등이 나누어 만들어져 있고 어떤 곳은 공동체부엌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 동네에 이런 시설이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을 했었다. 「잉여사회」(2013, 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최태섭은 최근의 잉여청년들을 연대와 공감, 새로운 창작 능력을 가진 우리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지역에 팹랩이 생긴다는 상상의 끝은 우리 청년들이 행복한 잉여가 되는 것이었다. /임경수 귀촌인 한겨레경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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