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농한기의 정적을 깨는 침입자 마침내 봄이다 . 아직 꽃을 구경하진 못했다 . 올해는 개화시기가 꽤 늦다고 , 여기저기 매화축제가 줄줄이 연기됐다더니 우리집 울 안에도 꽃은 멀어 보이다 . 경칩 무렵이면 꽃잎을 열어온 매화는 여태 망울을 꼭 닫고 있고 , 산수유는 이제 막 터지는 참이다 .
동네 톡방에 활짝 핀 노오란 복수초가 올라와 앞뜰에 나섰다 . 날은 확 풀려 푸근하지만 풍경은 휑뎅그렁하기 짝이 없다 . 풀 나무에는 물이 오르고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화사한 꽃과 새순을 ‘ 봄 ’ 을 구할 수 없으니 춘래불사춘 ,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은 시절이다 . 어디 풍경뿐인가 .
비상계엄에 이은 내란 사태가 순리대로 수습돼 정상을 되찾나 싶더니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 걱정이다 . 정략적 대응이 판치고 극우세력의 난동까지 겹쳐 시국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
물론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되리라 믿지만 어떤 후유증을 남길지 , 또 다른 심각한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심란하기만 하다 . 이래저래 봄 같지 않은 봄 . 사실 늦어진 개화시기 , 어수선한 시국이 아니라도 벼농사 전업농인 나에게 봄은 아직 먼 얘기다 . 아직 동안거 .
문득 밖으로 나서보니 꿈결처럼 슬픈 봄이 ... 며칠 전 SNS 에 울안의 나무에 매달린 꽃망울 사진을 올리면서 붙인 감회는 이랬다 . 꿈결처럼 다가오는 봄이 슬픈 까닭은 농한기의 정적을 깨드리는 침입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 가을걷이를 마치고 농가가 모두 끝난 겨울은 농부에게 더없이 아늑한 시간이다 .
마치 세간을 떠나 출가한 사문이 문을 닫아걸고 도를 닦는 동안거 같은 것이다 . 붙든 화두는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깨달음은 아직 멀기만 한데 겨울이 저물고 이제 선방의 문을 열어야 하니 오는 봄이 어찌 야속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 현실의 농부라 해도 마찬가지다 .
겨우내 빈둥대느라 몸과 마음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는데 어느 날 문득 “ 이제 다시 농사일 준비할 시간이야 !” 일깨우는 자가 나타난 셈 아닌가 . 그러니 다가오는 봄이 밀려드는 적군으로 보일 건 당연하다 . 그래도 어쩌겠는가 . 거스를 수 없는 게 자연의 섭리인 것을 .
한동안은 야속한 세월을 탓하다가 시나브로 익숙해지겠지 . 그리고 축 늘어진 심신을 추슬러 농사를 시작할 것이다 . 남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봄햇살이 들이 쬐니 완연한 봄임을 알겠다 . 머잖아 울안에는 매화 산수화 명자꽃 개나리 벚꽃 ... 눈부신 꽃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
농부는 그 꽃기운을 받아 농한기의 눅눅한 그림자를 떨쳐내고 들녘으로 나서겠지 . 그렇지 않아도 이곳 저곳 공공기관들도 ‘ 영농준비 ’ 를 위한 업무를 개시했다 . 고산권벼농사두레도 엊그제 정기총회를 열고 올해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
지난 6 년 동안 대표를 맡아 수고했다며 ‘ 감사패 ’ 를 주던데 그걸 받는 심경이 좀 복잡했다 . 올해부터 벼두레 활동에 적잖은 환경변화가 따르게 되는데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 주문 받은 쌀 택배를 보내러 읍내에 다녀오는 길 , 차창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
그래 , 어차피 봄은 오게 돼 있다 . / 비봉 염암마을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