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바야흐로 농한기다 . 논과 밭 , 한데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지친 심신을 가다듬고 쉬어가는 시간 . 더러 이리저리 쏘다니며 ‘ 무한대의 자유 ’ 를 한껏 누리기도 했더랬다 . 그 또한 덧없음을 느끼면서부터 농한기는 삶을 돌아보고 세상의 이치를 참구하는 관조의 시간이 되고 있다 .
올겨울도 그랬다 . 나락 거둬들여 방아찧고 여기저기 실어 보내고 , 논 임대료와 기계삯 방아삯 따위 셈 치르고 나니 바쁜 일이 얼추 끝났다 . 이제 평정의 시간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는데 이 사달이 난 것이다 . 비상계엄 선포와 실패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내란책동 .
명색이 ‘ 대통령 담화 ’ 라는데 20 세기 중후반에나 들을 수 있던 섬뜩한 , 그러나 촌스럽기 그지없는 언어들 . 이어진 ‘ 포고령 ’ 은 첫줄부터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원리를 부정했다 . 결국 절차와 내용 모두에서 헌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조치임이 확인됐다 .
국회가 곧바로 계엄해제를 결의한 건 당연하다 . 아울러 이번 사태가 민주적 헌정질서를 깨뜨리려는 내란책동임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 그럼에도 윤석열은 들끓는 ‘ 즉각 퇴진 ’ 여론을 외면한 채 여당에 공을 넘기고 말았다 .
‘ 친위 쿠데타 ’ 를 저지른 ‘ 현행범 ’ 이 퇴진을 거부한다면 탄핵소추를 통해 직무를 정지시키고 , 헌재의 결정에 따라 파면해야 마땅하다 .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1 차 탄핵투표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한다 .
시민사회가 크게 반발하고 있고 항쟁의 물결이 거센 만큼 탄핵이 되었든 하야가 되었든 큰 흐름을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 아울러 이번 사태 전개과정에서도 확인되었듯 우리 사회는 다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어떤 사태반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이제 하루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정치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됐다 . 그렇다면 애초 자질이 없는 자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으니 선거를 통해 다시 새로운 인물을 세우면 사태가 해결되는 것일까 . 문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
차가운 겨울 거리 , 촛불항쟁 , 8 년 만에 재현된 상황이다 . 그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데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 뿐만이 아니다 . 현행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는 1987 년 6 월항쟁의 산물이다 .
돌이켜보면 모두 8 명을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그 가운데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경우는 없었다 . 설령 시작이 창대했어도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 그렇다면 이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정치 시스템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
무엇보다 최고권력자 1 인에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진단이 많다 . 이번처럼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집권세력 안에서도 통제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 아울러 5 년마다 벌어지는 대선은 권력을 둘러싼 전쟁터가 되고 만다 .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OOO 이 대통령 되는 걸 막기 위해 ’ 투표해오지 않았던가 . 이런 상황에선 사회적 약자 권익보호 , 생태보전 , 성평등 같은 저마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국가정책이나 의제로 반영될 길은 막혀버릴 수밖에 없다 .
요컨대 40 여년에 걸친 제 6 공화국 헌정체제가 이같은 한계를 드러냈다면 무턱대고 정치일정을 서두를 게 아니라 체제전환을 위한 지혜와 상상력을 폭넓게 불러모아야지 싶은 것이다 .
정치에 관한 한 ‘ 이번 생애는 망했다 ’ 고 여기며 현실정치에 기대를 접어버린 어느 촌부가 느닷없이 농한기가 흐트러짐을 한탄하며 떠올린 ‘ 마지막 ’ 희망사항으로 읽어주기를 . /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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