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더위가 언제였던가 싶게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 입추는 한참 전이고 , 처서도 지났으니 그럴 밖에 . 뉘라서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을까 . 어느새 9 월 ,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 . 그 변화는 들녘에서도 감지된다 . 검푸른 생명력을 뿜어대던 논배미에는 연두 빛이 넘실댄다 .
벼이삭이 고개를 내밀면서 색조가 조금 옅어진 까닭이다 . 몸집 불리기에 바쁘던 ‘ 영양생장 ’ 을 지나 열매 ( 나락 ) 를 맺는 ‘ 생식생장 ’ 에 들어선 것이다 . 논배미에는 이 즈음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 지난 한 달 남짓의 짧은 기간에 벼 포기는 가히 ‘ 혁명적 ’ 이라 할 변화를 거쳐왔다 .
줄기 속에 이삭이 생겨나 ( 유수형성기 ) 조금씩 자라났다 . 이삭이 충분히 자라나면 줄기는 새끼를 밴 것처럼 불룩해지는데 이 때를 수잉기라 한다 . 이삭이 패면 ( 출수기 ) 곧이어 벼꽃이 피고 가루받이를 거쳐 수정이 이루어진다 .
그러면 벼의 열매라 할 나락이 생기는데 , 처음엔 뜨물처럼 묽었다가 차츰 쌀알로 굳어진다 . 이삭이 여무는 ( 등숙기 ) 끝 무렵이 되면 나락을 거둬들이게 된다 . 필요한 사람의 손길 ( 농작업 ) 도 그 때마다 다름은 물론이다 .
새끼치기가 마무리되는 즈음부터는 뿌리가 산소를 흡입할 수 있도록 하루 걸러서 물을 대고 , 떼는 일에 매달렸다 . 이삭이 팰 즈음부터는 ‘ 꽃물 ’ 이라 하여 다시 물을 흠씬 대줘야 한다 .
올해는 다행히도 김매기에 매이지 않는 바람에 벼 줄기를 뽑아다 해부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생장단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이삭이 패고 , 가루받이가 끝나 여물어가면 다시 물을 끊게 된다 . 물 빠짐이 좋지 않은 논배미는 도랑을 치고 , 벼 포기 사이로 물곬 ( 도구 ) 을 내어 물을 빼줘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콤바인 수확작업에 애를 먹기 때문이다 . 수풀이 길게 자란 논두렁을 깎는 일도 만만찮다 . 아무튼 이 모든 일거리는 어제까지 다 끝났다 . 내일은 벼농사모임 회원들과 더불어 백중잔치 ( 음력 7 월 15 일 ) 를 벌이기로 했다 .
함께 논배미를 둘러보며 작황을 살피고 , 영상기록을 통해 지난 한 해 농사도 돌아볼 참이다 . 술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고 . 벼이삭은 이제 조금씩 여물어 갈 것이다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 정말 그렇다 .
고개를 내밀고 꼿꼿하게 서 있던 놈들이 속이 들어차면서 하루가 다르게 아래쪽으로 숙어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요즘이다 . 하지만 이 자연의 섭리와는 딴판인 세상사를 대하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던 자들은 권력을 쥐는 순간부터 돌변한다 .
목에는 잔뜩 힘을 줘 뻣뻣해지고 , 세상 모두가 제 것인 양 안하무인이다 . 상식도 절차도 무시한 채 힘으로 내리누른다 . 머잖아 물러날 그 자리가 마치 종신직이나 되는 듯 미쳐 날뛰는 꼴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 이 뻔뻔한 권력놀음에는 중앙권력 , 지방권력이 따로 없다 .
한 줄기 바람이 스칠 때마다 드넓은 논배미는 푸른 물결로 일렁인다 . 그 속에서 고개 숙인 벼 이삭이 흔들린다 . 헛된 욕망에 매이지 않고 , 뿌린 대로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일러주는 듯하다 .
그래 , 혹여 있을지 모를 태풍 잘 넘기고 날씨는 순조로워 땀 흘린 만큼만 거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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