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역시 푸지다 마침내 가을이다 . 날씨라는 게 시나브로 바뀌는지라 몸은 이미 이 새로운 계절에 길이 들었지만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더랬다 .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으랴만 되돌아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
굳이 뒤를 돌아 무더위를 불러오는 까닭은 찬 바람이 불어도 이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 아무튼 가을이다 . 가을은 하늘이다 . 올해는 하늘빛이 여느 해보다 눈부시진 않지만 그래도 높고 파랗긴 매한가지 .
하도 맑아서 손을 높이 벋어 손가락으로 살짝 찍으면 동그란 물결이 번져갈 것만 같다 . 뭉게구름이라도 하나 둘 둥둥 떠 있으면 그것으로 가을 정취는 완성 . 그 하늘 아래로는 황금빛 물결이다 . 바로 이맘때 , 열흘 남짓만 반짝 누릴 수 있는 눈부신 빛깔 .
저 파란 하늘과 황금빛 들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벼농사두레는 해마다 ‘ 황금들녘 풍년잔치 ’ 를 벌여왔다 . 올해 잔치는 4 년 만에 펼쳐졌다 . 지난 3 년은 코로나 팬데믹과 흉작이 겹쳐 눈물을 머금고 건너뛰었더랬다 .
그 대신 ‘ 풍상들녘 위로잔치 ’ 니 ‘ 힘내잔치 ’ 니 회원들끼리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아쉬움을 달랬었다 . 아쉬우면 절실함도 커지는 법일까 ? 많은 이들이 가을날을 함께 누렸다 . 벼농사두레 회원 말고도 이름을 모르고 , 얼굴이 낯선 이들이 여럿이었다 .
프로그램이라야 논배미에서 메뚜기 잡고 , 가을들녘을 화폭에 담는 예술제와 신발 던지기 , 제기차기 , 단체줄넘기 , 이어달리기 따위 별다를 게 없었지만 분위기는 뜻밖에 후끈 달아올랐다 . 불쑥 경쟁심이 차올랐거나 저마다 내놓은 ‘ 상품 ’ 에 군침이 돌았거나 .
아무렴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 알맞은 햇발 아래 펼쳐진 가을 잔치인데 재미가 없었다면 그건 다 자기 탓이다 . 그리고나서 며칠이 흐른 지금 황금들녘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 수확기계 ( 콤바인 ) 가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엊그제가 우리 논 첫 수확이었다 .
기계가 자꾸 고장나 멈추는 바람에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스무 마지기 넘게 해치웠다 . 가을장마가 이어지는 통에 병충해가 번져 걱정이 컸는데 막상 거둬들이고 보니 소출이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 다행이다 . 더불어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가을걷이를 시작한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볍다 .
햅쌀을 고대하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보낼 수 있어서다 . 첫 수확을 끝낸 저녁 무렵 , 그렇게 가벼워진 발걸음을 미디어센터 옥상으로 옮긴다 . 별빛이 총총한 옥상에서 밤새도록 영화 여섯 편을 보는 < 고씨네 별밤극장 > 이 펼쳐지는 곳이다 .
고산권 주민 영화동아리 ‘ 고씨네 ’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는데 , 한 달에 한 번쯤 함께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나눈다 . 그러다가 완주미디어센터의 위탁을 받아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게 된 것이다 . 수 십 명이 정말로 밤을 새워 영화를 봤다 .
한 편 한 편 상영이 끝날 때마다 영화토크가 펼쳐졌다 . 유명 영화 의상과 소품으로 치장하고 사진을 찍는 코스프레 포토타임에 멋지께 폼을 잡아보고 , 출출해지는 한밤에는 때맞춰 라면타임이 펼쳐져 속을 달랠 수 있었다 . 가을밤 , 아직 익숙해지기 전이니 몹시 차가운 날씨다 .
다들 겨울옷에 담요를 둘러 쓰고 찬이슬을 견뎌낸다 . 영화상영이 모두 끝난 시각은 새벽 5 시쯤 , 그 때까지 ‘ 살아남은 ’ 사람은 모두 열 댓 명 . 초췌하고 피골상접한 몰골로 기념촬영을 하고 영화제는 마무리됐다 .
잠을 못 이룬 몸은 찬 기운에 으스스 떨고 있지만 부옇게 동터오는 새벽은 상쾌하기만 하다 . 가을은 역시 푸지다 . 몸이 가볍고 , 입이 즐겁고 , 눈과 귀가 호강하는 시절 . 시간이 예서 멈추게 할 순 없겠지 . / 차남호 (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