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면은 ① 가천 [ 가천 , 오상 , 만석 , 구재 , 요동 , 동향동 , 시우동 , 신흥 ( 묵방 )] ② 경천 ( 경천 , 오복 , 갱금 , 죽림 , 대석 , 성가 , 오봉 ) ③ 용복 ( 용복 , 석장 , 신덕 , 구수동 , 만수동 ) 법정 3 개리로 구성되어 완주 10 면 중 막내 격으로 얘기 거리가 많다 .
조선시대 고산현 ( 군 ) 운동하면 ( 雲東下面 ) 이었고 , 서기 1914 년까지 북동부 ‘ 운동상면 ( 雲東上面 )’ 과 각각 독립 면이었으나 1935 년 두 면을 합쳐 운주면 ( 雲洲面 ) 이 되었다 .
행정편의상 1966 년 ‘ 경천출장소 ( 庚川出張所 )’ 를 두었고 , 1989 년 ‘ 용복 ’+‘ 가천 ’+‘ 경천 ’ 3 개리를 묶어 경천면으로 승격 오늘에 이른다 .
경천면은 경좌 ( 庚坐 : 개앉음 ) 라는 지명에서 ‘ 경 ’ 자와 , 가천 ( 佳川 ) 에서 ‘ 천 ’ 을 따 ‘ 경천 ’ 인데 이제부턴 가천 이야기이다 . 최고 자랑거리가 가천초등학교 (1929 년 개교 ) 로 왜 여기 있나 . 이 마을이 운동하면소재지이었기 때문이다 .
아담한 학교 교정에는 교장공적비가 있고 , 여러 개의 거사비 ( 去思碑 ) 는 마을 안에 있으며 , 경로당에는 이야기가 풍성하다 . △ 일정시대 정씨 금방아간이 있었고 , 금을 다루니 금 부자 그 당시 상여 나갈 때 찍은 사진에 만사가 수백 장이었다 .
△ 김재근 ( 金在靳 :1900 년생 ) 한약방은 병을 잘 고쳐 주민이 좋아했고 , 의원은 돈 벌어 기뻤다 . 잘 살아야 큰일을 한다 .
일곱 살에 어머니 (1940), 이어 아버지 (1943) 가 죽어 고아가 된 조카 김춘회 (10 월 10 일 작고 ) 를 길렀고 , 조카는 장성해 건축업으로 성공 85 세를 넘어서도 에쿠스를 타고 다니나 어릴 적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물이었다 .
신흥은 지형상 언젠가 저수기가 들어설 자리이니 주민은 반대하지 말고 지명이 지닌 뜻대로 ‘ 가천 ’-‘ 신흥 ’ 을 부각시켜 천하제일 폭포 동을 만들어야 한다 . ‘ 묵방 ’ 은 먹방 . 산이 가깝고 높아 숲이 우거져 낮에도 어둠침침 이래서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이다 . 여기에 박 ○ 충 산이 있었다 .
벌목계약 후 돈까지 오갔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 작업을 못했고 4-5 년이 지나서야 일을 하려하니 산주 박씨가 ‘ 이제 못 베어간다 .’ 고 제동을 걸어 결국 다툼이 법정으로 갔다 . △ 가천은 소 돼지축사가 없다 .
한때 뒤처지는 걸로 보였으나 지금은 공기가 맑아 땅값이 비싼 청정지대로 서울에서 돈 벌어 고향에 큰 집 지은 멋쟁이가 여럿이다 . 마을 위편 길가에 스승을 잊지 말자며 세운 사은비 ( 師恩碑 ) 가 좋은 인상을 준다 . 곶감이 유명하고 대추는 경천을 대표하는 특산물 1 호에 든다 .
여름철 저수지로 들어가는 물길 ( 터널 수문 ) 을 이리저리 막으면 물고기를 몽땅 주어 담는 아름다운 고장 이름 가천과 딱 어울린다 . 9 세기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가 ‘ 점령지 화해수단으로 화암사 ’ 를 지었다고 봐야 한다 . 전계현 목사가 여기 출신이다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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