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알려지지 않았나? 고산면 율곡리 김도련 (1933 ∼ 2012) 은 독학한 한문학의 대가로 국민대학교 교수였다 . “10 년간 지병으로 의사소통은 못하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 아들 영찬의 말이다 .
“ 세상 고문을 단지 낡고 썩은 걸로 보아 궤철을 달리할 때에도 선생은 고문의 참정신이 옛날에 있지 않고 , 지금에 있음을 알아 뚜벅뚜벅 그 길을 갔으니 , 여말 이제현 선창 이래 농암과 연암을 거쳐 영재 창강으로 이어진 고문 연면한 맥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 제자 정민 교수가 지은 묘갈명 ( 墓碣銘 ) 의 한 구절이다 .
△ 힘들어도 굴하지 않았고 △ 어려운 환경을 이기기에 자부심을 가진 학자이었다 . ‘ 이런 사람을 왜 완주인은 모르는가 ?’ 고향에 자주 오지 않았다 . 온다 해도 슬쩍 다녀만 간다 . 모를 수밖에 없다 . 이게 완주인의 병폐요 , 타성이었다 .
1950 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완주중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했지만 한문 실력이 있어 1968 년 국사편찬위원회 고서원에 합격했고 , 서울대 , 연세대 , 국민대 강의를 다니다 1979 년 국민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 실력을 발휘해 한시를 주제별로 엮은 『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 』 를 냈다 .
저서 『 한국고문의 원류와 성격 』 『 한국고문의 이론과 전개 』 가 있다 . 연합뉴스 황윤정 기자는 ‘ 고전 문장에 대한 연구가 ’ 라 썼는데 , 2012 년 7 월 26 일 충남 예산 화산추모공원에 묻혔다 .
고산 사람들은 ‘ 국졸 ( 國卒 ) 한문학 ( 漢文學 ) 의 대가 ( 大家 )’ 이 한 마디라도 기억해 주어야 한다 . 지난 이야기지만 고산향교에서 이런 학자 모시고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모른다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
국악인 남상일을 봉동에서 , 김수태 부부 변호사를 화산에서 , 구이에서 이상남 전 완주경찰서장 아는 사람이 드물다 . 더러는 자기를 감추고 남이 알까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 문화체육관광부의 어느 차관보는 고향 사람 편지에 답장이 없었고 , 경주 어느 호텔 사장은 사귐을 끊겼다 .
이러하지만 김춘진 , 정성모 , 유희태 , 두세훈은 웃고 다닌다 . 알아달라면 알아줘야한다 . 김태식 전 국회의원은 어디 사나 . 자서전 『 정치 아리랑 』 군민들 읽어볼 책이다 . 독감 걱정하는 철에 전 완주보건소장 태안당 ( 泰安堂 ) 유효숙 생각이 난다 .
구영철 전 완주문화원장이 2012 년 12 월 종세하여 12 일이 5 주기였다 . 화산 , 고산 , 비봉면에서 책 ( 면지 ) 을 낸다는데 좋은 얘기를 많이 찾아 써야한다 . 봉동읍의 경우라면 윤건중 전 농림부장관의 특집란 생각을 해 두어야 한다 . “ 나보고 급료 받으라하면 당장 그만두리다 .
” 대기업 근로자들은 깊이 생각하고 임금투쟁 해야 한다 . 경쟁 관계에 있었던 봉동 이 〇〇 공적비는 있으나 윤건중은 잊어만 간다 . 같은 성격의 < 봉동농업협동조합 > 에서 윤건중 선생을 챙긴다면 ,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그 아름다운 사업처럼 장한 업적이 될 것이다 .
‘ 완주정신 정립 ’ 이 시급하다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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