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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16.03.07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21

고산면 살기 좋은 어우리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16.03.07 14:54 조회 5,4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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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리는 ‘3거리’라 내왕이 편리해 이야기도 많다. 한 때 ‘비봉3거리’라는 지칭은 ‘비봉 들어가는 3거리’의 주린 말이다.

이발소, 방앗간, 술집, 가게가 있어 이리저리 소문 난 곳이며 안밤실, 분토동, 바깥밤실, 뱀재, 비봉에서 내려오는 수원이 좋아 물방아를 돌렸고, 앞냇물은 수영하기야 좋지만 마을 농사와는 거리가 멀다. 어우보물은 봉동 율소리 아래 농수로 쓰여 시비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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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1645) 여름 가뭄에 논이 마르자 전주부윤이 관찰사에게 상신하여 ‘고산 모든 저수지’를 터서 물을 빼갔다. 고산현민들이 울며 현감께 달려와 호소하니 현감 역시 화가 나 농민들에게 전주저수지를 트게 했다.

어떤 이가 현감에게 “전주 사람들 한 짓이야 괘씸하지만 이미 내려간 물을 터버리면 남의 잘못을 본떠 더 심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자 현감의 말 “그렇기야 하지만 전주사람들 우리 작다고 제 지역 큰 것만 믿고 멸시하니 만약 그대로 둔다면 두고두고 폐단이 될 것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결국 정우량 현감 고산현민을 위하다 불이익을 당했다. 어우리는 고령김씨, 양주조씨, 안동권씨,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인물이 많아 조창희는 젊어서 계성학교를 이끌었고 지방자치제 초창기 고산면의원을 지냈으며 근래 조씨 집안에서 고시합격자도 나왔다.

서울 권경로는 아들 개혼 때 자기 초등학교 스승을 주례로 부른 대단한 사람이며, 김재옥은 글씨를 잘 썼고 1950년대 지방정치에도 참여했다. 그의 동생 재홍은 말을 따고 학교 다녔다. 이 동네 이름 ‘어우리(御牛里)’, ‘어우정(魚牛亭)’ 표기도 있으며, 김길현(金佶顯) 선비는 손님 대접을 잘했다.

삼례 석전 이병교와 화산면 종리 김정만 학자 찾아와 자면서 “…봄바람 살살 불어 아늑한 흰 구름 간지럽히고, 서늘한 새벽 달빛 물에 비쳐 집안이 환하누나(雲山縹緲春風細 水閣鮮明曉月凉)…”이렇게 읊었다.

또 어느 날이던가 김정만과 일행은 “밤새도록 실컷 얘기하고 나니, 새벽엔 할 말 없어 헤어질 일만 남았구나(…夜久團欒知己詁 休言淸曉別離分” 멋진 교분들이다. 어우교회는 머리를 길게 딴 구주서 장로와 인연이 깊고 삼우초등학교도 사연 많은 학교다.

1968년 3월 2일 고산초등학교 ‘어우분교장’으로 문을 열은 후 1970년 3월 1일 고산서(高山西)국민학교로 승격했다가 1990년대 이농현상이 부쩍 늘어 폐교 위기일 때 삼기초등학교와 두 학교는 절묘하게 통합하여 <삼우(三牛)초등학교>로 오늘에 이른다.

‘삼’은 삼기(三奇)에서 ‘우’는 어우리(於牛里)에서 왔다. 본지「농촌 별곡」차남호 님처럼 모여드는 마을이다. 조중빈, 정성수, 김광호, 김재전, 김순호, 권경호 나가 잘된 인물 많고 늘 모범부락으로 앞서가는 마을이며 소금바위엔 양주조씨 정려각이 있다.

‘가릅재’과 율소리 곁의 ‘신덕마을’ 여러 이야기를 간직했다. 샘골 우주황씨 묘역에 임진왜란 당시 배재싸움에서 전사한 우주황씨 ‘황박 의병’의 단소가 있건만 아는 사람 드물다. 걸어다니던 시절 새뺑이(새빤이)를 넘으면 봉상 땅. 소금바위[鹽巖]는 ‘속은 바위’라는 뜻일수도 있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

현장 사진

고산면 살기 좋은 어우리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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