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리 - 가천리 - 용복리 세 부락 ( 법정 ) 이 경천 ( 庚川 ) 면이다 .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 한국지명총람 』 에도 들어있지 않다 . 부락 셋에 ① 대석골 물 ② 신흥골 물 ③ 화암사골 물 ④ 구제골 물 이 네 마디면 설명도 끝이다 . 그러나 듣고 묻는 다면 이야기는 계속 된다 .
신흥골이 기장 깊어 ▴ 귀신 ▴ 도깨비 ▴ 사나운 짐승이 많아 천하장사도 선뜻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 가장 무서운 짐승이 여우이다 . 송장을 파먹으며 오래된 수미호 ( 九尾狐 ) 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넋을 빼앗기에 당시 욕으로 미운 사람에는 ‘ 시흥 가서 돌아오지 못할 놈 !’ 이라 했다 .
시흥 가운데 먹방이 ( 먹뺑이 ) 가 덕 깊어 고산지역 최고의 오지 ( 奧地 ) 로 지칭됐다 . △ 먹방이에 아버지도 눈이 하나 ( 장애 ) 아들도 하나이었다 . 그런데 어느 날 밖에서 눈 둘인 ( 성한 눈 ) 사람이 오자 부자는 깜짝 놀라며 . “ 허허허 !
이 세상에 ‘ 눈 둘인 사람이 다 있다 ’ 며 , 보따리를 싸 들고 달았다 ” 는 이야기가 있었다 .
△ 또한 신흥 먹방이 부자가 고산 장에 가기 위해 ‘ 먹방이 ’ 를 나서 가천에 이르니 아들이 하는 말 “ 아부지 세상 이렇게 넓은 디가 다 있어유우 .” 아버지 “ 저 아래에 가면 더 널은 디가 있다 .” 부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삼기면 ( 지금 고산 ) 삼기리에 이르렀을 때 아들의 말 “ 아부지 !
시장 아부지 혼자 다녀와요 . 나는 무서워 더 이상 못 따라가겠시유 ” 오던 길을 확 뒤돌아섰다 . 아버지도 아들을 위해 뒤돌아섰다 . 집에 도착 한 아들은 아부지 이렇게 편한 디가 있는 디 장은 무엇 하러 가유 ?” △ 1965 년 큰 재판이 있었다 .
산주 ( 박씨 ) 는 1950 년 봄 임야를 팔았는데 산 사람 을은 곧 전쟁이 일어나 나무 한 그루 배지를 못하고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
을은 작업을 하려 산에 들어서니 산주의 말 “ 임목 1950 년에 팔았고 , 지금까지 나무 베어가지 않은 건 당신 개인 사정이었으니 이젠 못 벤다 .” 희대의 재판이 벌어졌다 .( 승부 생략 ) △ 전쟁은 참혹했다 . 먹고 살기 위해 톱 도끼를 메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도벌했다 .
이러던 골짜기를 이제 보니 ‘ 난 가발이다 ’ ‘ 그게 아니다 ’ 시비가 심한 걸로 소문이 났다 . 신흥이 새롭게 일어서는 것 좋으나 시비 는 없기를 바란다 . 수리시설에 묘수 ( 妙手 ) 가 있다 .
1930 년대 초 경천저주시를 만들며 , 굴을 뚫어 경천 물을 모두 끌어들고 , 수문관리 때면 물고기를 가마니로 잡았다 . 용복 가천은 건천 ( 乾川 )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았다 . 냇가에 대추나무를 심어 대추가 특산물이다 .
들녘 사람이 “ 대추나무 뭣 먹고 자라오 ?” 주인 대답 “ 자갈이 오줌 싸 그 것 먹고 살지요 .” < 완주독립기념관 !> 군민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 17 번국도 새 터널 이 지역의 명물이다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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