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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17.12.07

농촌별곡

어느 '폭폭한' 겨울날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17.12.07 11:12 조회 5,46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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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폭폭한' 겨울날 벌써 12 월이다 .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소회보다는 이젠 꼼짝없이 겨울이라는 스산함이 더 앞선다 . 그도 그럴 것이 앞산을 쳐다봐도 , 뒷산을 둘러봐도 수목의 빛깔은 한결 칙칙해졌다 . 이젠 ‘ 단풍 ’ 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그나마 좀 더 지나면 우수수 떨어져 앙상해지겠지 . 첫눈이 온 지도 열흘 가깝다 . 제법 내렸는데 , 무엇보다 가파른 들머리길이 걱정이었다 . 눈이 많이 쌓이면 자동차가 드나들기 어려운 탓이다 . 거리가 족히 2 백 미터는 되니 제설작업도 녹록치가 않다 .

다행히 그날은 자동차가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지만 정말 큰 눈이 오면 어쩌나 싶어진다 . 눈 덮인 산자락과 둔덕이 그려내는 눈부신 설경이며 겨울나무가 연출하는 눈꽃잔치 따위를 들먹였다간 누구 말마따나 ‘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 로 퉁맞기 십상이겠다 . 그러고 보니 글머리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

사실 이번 겨울을 맞는 느낌이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르다 . 애써 가꾸고 잘 갈무리해 든든한 겨울 , 바깥엔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지만 집안은 훈훈하고 아늑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뒤숭숭한 겨울 . 요즘 마음이 그렇다 . 오늘 아침도 . 그새 미뤄오던 ‘ 도지쌀 ’ 을 실어 날랐다 .

부치고 있는 논 임대료를 쌀로 내는 현물지대인 셈이다 . 보통은 현금으로 환산해 지불하지만 굳이 쌀로 달라는 경우가 더러 있다 . 그 양이 좀 되어 트럭 짐칸에 실은 쌀 포대가 제법 수북하다 . 계산속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돈 대신 곡간에 그득한 쌀로 도지를 치르면 일단 마음은 가볍다 .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농촌에서는 쌀을 거래할 때 , ‘ 사고 - 파는 ’ 개념이 거꾸로 통용됐었다 . 쌀을 남한테 넘겨줄 때 “ 쌀을 샀다 ”, 쌀을 들여올 때는 “ 쌀을 팔아왔다 ” 그랬다 . 시골에서는 돈이 귀하니 “ 쌀을 주고 돈을 사왔다 ” 는 돈 중심의 표현이 그리 굳어졌다는 설명이 있다 .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그 옛 관행에 공감한다 . 엊그제는 현금지대를 인터넷뱅킹으로 이체했다 . 현물지대보다 액수가 훨씬 많다 . 내친 김에 묵어 있던 기계삯이며 작업비 , 농자재비 따위도 지불했다 . 한꺼번에 목돈이 빠져나가니 계좌의 잔고가 푹 꺼져버렸다 .

남은 빚까지 털어내고 나면 살림살이가 간당간당하다 . 빚은 목돈으로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데 , 거둬들인 쌀 ( 나락 ) 은 곳간에 쌓인 채 시나브로 감질나게 팔려나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 그게 ‘ 농사꾼의 숙명 ’ 이라나 뭐라나 .

어쨌거나 도지쌀 실어다주고 코가 쑥 빠져 집안에 들어서니 또 다른 험한 꼴이 기다리고 있다 . 울안에 심어둔 단풍나무 줄기가 모조리 잘리고 , 밑둥은 허옇게 껍질이 벗겨져 있다 .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

“ 남새밭에 나무그늘이 져 채소가 제대로 못 자란다 ” 고 하시기에 굴삭기 작업하러 올 때 옮겨심으마 했는데 , 그 새를 못 참으시고 저런 참극을 펼쳐 놓으셨다 . 채소도 안 자라는 이 겨울에 . 애꿎은 나무가 불쌍하고 아깝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렇다 치고 .

여러 얘기를 듣긴 했지만 몸소 겪어보기는 처음이라 어찌 대처할지 황망하기만 하다 .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고 , 휭 찬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다 . 이래저래 겨울이다 . 하긴 ‘ 하얗게 눈 덮인 숲 속의 따뜻한 오두막집 ’ 은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지 .

겨울은 본시 북풍한설 몰아치는 계절이지 . “ 겨울은 겨울다워야 제 맛이야 . 지구온난화 , 열대야로 뜨거워진 여름을 생각해보라고 !” 나름 호기를 부렸었는데 ... 이번 겨울엔 기가 꺾였나 ? 벌써부터 봄이 그립다 .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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