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냇물따라 사람과 시간이 모여 흐르네 봄의 중심이자 절정에 다다랐다 . 나무들이 피워낸 어린잎과 산과 들에서 솟아난 꽃들의 발랄한 색으로 온 마을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 거리에는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람들이 골목을 거닌다 .
비봉면소재지와 맞닿은 원소농마을에도 사람들이 제법 바깥에 나왔다 . 소일거리를 하고 옛 빨래터에 앉아 봄나물을 헹구며 각자의 일과를 보냈다 . 냇길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 따스한 계절이 빚어낸 사랑스러운 풍경을 구경하다 보면 동네 한 바퀴가 금방이다 .
마을 중앙으로 뒷산에서 흘러 내려온 시원한 물이 흐른다 . 과거 빨래터이기도 했던 이 냇가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 원소농마을에 찾은 날마다 소쿠리를 옆에 낀 아낙들이 부지런히 냇가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예부터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이른 아침에는 먹을 것을 씻어가고 , 한낮에는 빨랫감을 가져오거나 설거지했다 . 장점순 (74) 어르신은 막 캐온 쑥과 돔나물을 물에 헹구고 있었다 .
점순 어르신은 “ 쑥은 된장 넣고 국 끓여 먹으면 맛나고 돔나물은 장 넣고 비벼 먹거나 말간 국물에 넣으면 된다 ” 며 “ 지금은 집에 수돗물이 잘 나오니까 편하지만 그때는 집집마다 물이 귀했다 . 그때부터 빨래터에 들고나온 게 몸에 배서 지금도 나온다 ” 고 말했다 .
빨래터에서 갓 따온 봄나물을 헹구는 점순 어르신. 1972 년도에 익산에서 이곳으로 시집 온 심철례 (77) 어르신도 빨래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 당시엔 식수가 없어서 냇가에서 물을 길어다 마시기도 했다 . 철례 어르신은 “ 누가 김장하는 날이면 그 집이 물을 쓰도록 위에서 빨래도 안 했다 .
시집오고 나서 2~3 년 뒤엔가 수도랑 전기가 들어와서 그 풍경도 서서히 사라졌다 ” 고 말했다 . 버스 정류장을 지나 마을 초입 부근에는 비닐하우스와 아담한 논이 모여 있다 . 그 건너에는 조옥선 (79) 어르신 댁이 있다 . 어르신은 집보다는 바깥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
어느 날은 빨래터에서 쪽파를 씻고 또 다른 날엔 수레에 채소를 가득 싣고 골목을 걷고 있었다 . 옥선 어르신은 “ 아침에 영감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받아왔는데 이걸 소 막사에 뿌리면 냄새가 덜 난다고 그랬다 .
나간 김에 무순 , 당근을 좀 사 왔는데 이걸로 쪽파로 김치 좀 담그려고 한다 ” 며 웃었다 .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노인 공공근로를 다니는 등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
어르신은 “ 옛날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들은 따로 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그래도 부지런하게 노력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 . 게으르지만 않으면 굶주리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 고 말했다 .
일주일에 세 번은 노인공공근로를 하는 조옥선 어르신은 늘 바지런해 집보다는 바깥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 . 척박한 땅에 피어난 귀한 인물들 예부터 마을에 경작할 땅이 적어 주민들이 대부분 소농이고 먹을 것이 부족했다 .
‘ 자원이 없는 곳에선 사람이 보석 ’ 이라는 말이 있듯 원소농마을엔 유독 이름난 인물이 많다 . 대표적인 인물로 故 류준상 (1911~1950) 제헌 국회의원과 故 류한상 상무부 공업국장이 있다 . 두 인물은 인민공화국 시절이 도래하면서 참혹하게 희생됐다 .
이들의 후손인 유희남 (71) 어르신은 그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 희남 어르신은 “6.25 때 비봉에 있는 지역 고위층들은 거의 피살당하셨다 .
큰아버지이신 류준상 초대 국회의원께서는 목화밭에 숨어있다가 어떤 사람이 신고해 붙잡혀서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진 않았지만 형제를 두 명이나 잃어서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하셨다 ” 고 말했다 . 희남 어르신이 경운기에 비료 포대를 싣고 있다.
마을에 남성 중 최고령인 유민상 (84) 어르신도 옛 기억을 더듬었다 .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해내며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 어르신은 “ 전쟁 전에만 해도 우리 마을에 국회의원 , 면장 , 도의원 같은 벼슬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
근데 그분들이 다 인민군들한테 희생당하면서 쑥대밭이 되었다 ” 고 말했다 . 과거 마을에서 고위직을 맡은 인인물로 고흥유씨가 대부분이다 . 이밖에 원소농마을이 유명세를 떨친 데는 농악회를 통해서였다 . 초등학교에서도 마을잔치에서도 항상 농악이 펼쳐졌고 주민들에게 농악은 곧 일상이었다 .
이경배 (74) 어르신은 “ 고인이신 이귀환이 우리 아버지인데 상모 돌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이었다 . 열두 발이나 되는 상모를 돌리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했다 ” 며 “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꽹과리도 잘 치고 상모도 잘 돌리셔서 옛날엔 뭘 하든 참 재밌었다 ” 고 회상했다 .
경로회관 맞은편에 자리한 '농기구써비스수리쎈타'. 마을 공용 건물은 아니며 개인이 임대료를 내고 사용 중이다. [ 박스 ] 원소농마을은 마을 명칭은 본래 소롱 ( 小 작을 소 籠 대그릇 롱 ) 으로 썼고 대롱 ( 大 클 대 籠 대그릇 롱 ) 과 대비된 이름이다 .
또는 윗동산의 형태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도 전해진다 . 현재 30 가구 , 90 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 과거 고흥유씨 , 담양국씨 집성촌으로도 알려진 마을이다 .
옛날엔 마을 부지가 바다였다는 전설도 전해지는데 앞산 중턱에 올라가 보면 토기 , 옹기의 파편이 남아있어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며 마을 부지 땅을 깊게 파보면 뻘 ( 개흙 ) 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