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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2017.05.01

배꽃 피는 정농마을

황해도에서 피란 온 한광군-오경옥 부부

마을과 사람, 계절과 공동체의 시간을 깊이 있게 기록하는 완두콩의 기획 기사 모음입니다.

등록 2017.05.01 11:22 조회 3,9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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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농마을이 우리 고향이지" 황해도에서 피란 온 한광군-오경옥 부부 정농마을에 산지 어느덧 60 여년 . 14 세에 피난을 나온 학생은 이제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마을의 최고령 할아버지가 됐다 . 한광군 (85)- 오경옥 (81) 부부는 모두 고향이 황해도이다 .

광군 할아버지는 풍해면 , 경옥 할머니는 운유면이 고향 . 마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둘은 군산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 “ 싫지 않으니까 시집왔죠 . 지금이야 배도 나왔지만 예전에는 날씬했어요 . 그전에는 이렇게 안 생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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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식 지내고 택시를 타고 여까지 온 것이 그게 신혼여행이나 같은 거에요 .”( 경옥 할머니 ) “ 그때 기억나죠 . 우리 둘을 맺어준 사람은 나보다 한 살 밑에였는데 벌써 저 세상으로 갔어요 .”( 광군 할아버지 ) 광군 할아버지는 20 대 초반에 정농마을로 왔다 .

풀도 안 난다는 황무지였다 . 마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밭을 개간했다 . “ 지금 이 땅들은 전부다 마을 사람들이 일군 거 에요 . 지금 이 집터도 내손으로 일궈서 만든 거죠 . 전부 다 황무지였어요 . 우리가 지금 배농사를 짓는데 그때 그 배나무도 우리 할마이하고 제가 다 심은거죠 .

지금은 며느리가 그 농사를 짓고 있지만 .” “ 처음엔 복숙나무도 심었고 , 논도 조금 짓고 . 그땐 새벽 3 시에 일어나서 불 때놓고 밥 해먹고 . 딸기 따서 남부시장에 팔러 가고 . 그때는 여기 버스도 안 들어왔어요 . 이야 , 그때야말로 참말로 옛날이다 .

하여간 돈 될 만한 건 다 했어요 .” 마을 사람들은 황무지였던 땅을 모두 개간했다. 노부부도 그들 중 하나였다. 부부는 기억을 더듬어 피난오던 시절을 떠올린다 . 행복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 “ 열여덟에 나왔는데 기억이 왜 안 나겠어요 . 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

고향에서 중핵교 다니다가 책보도 내버린 채로 나왔어요 . 저 중 3 때 6·25 가 발발했거든요 . 아구리선 ( 전차상륙함 ) 이라고 알아요 ? 입 벌린다고 해서 아구리선이라 불렀는데 .

그거 타고서 군산까지 와서 해망동에 있는 수용소에서 한 3 년을 살다가 왔어요 .” 한 할아버지는 ‘ 운이 좋게 ’ 어머니와 5 남매가 함께 피난을 나왔다 . 그리고 정농마을에 정착했다 . “ 그 배가 금방 왔다갔다하는 배가 아니에요 . 못 나온 사람들 많죠 .

자기 가족도 같이 못나온 사람도 많은데 . 우리 어머니는 5 남매를 다 데리고 나왔어요 . 그래서 하나도 낙오 없이 그대로 키워서 시집장가 다 보냈어요 . 참 다행한 일이죠 . 안사람은 힘들게 살았어요 .

부모님 여의고 고생 많이 했어요 .” 이곳에 정착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태어나고 자란 그곳이 생각날 때가 있다 . “ 아 , 고향 생각 날 때 있죠 . 텔레비전에서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적으로 생각이 나요 . 그래도 고향은 안 가고 싶어요 . 너무하잖아요 .

평화 ( 통일 ) 가 됐다하면 한번 관광은 가보고 싶어요 . 이 마을에 자기 살던 마을 구경 갈 사람은 많아요 . 우린 이젠 다 늙어서 평화는 안 될거고 . 가끔 우리 참 잘 나왔다고 그런 이야기하죠 .”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부르지만 부부는 정착해 스스로 땅을 일궈 살아온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 .

그것이 이들의 고향이다 . 그렇기에 이들에게 고향이라는 단어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깊이를 가지고 있다 . “ 여기서 늙었어요 . 60 년은 살았죠 . 우리에겐 여기가 고향이에요 . 이제는 .”

현장 사진

황해도에서 피란 온 한광군-오경옥 부부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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