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은 실컷 했어도 애들 키울 때가 좋았어" 마을을 찾은 첫째 날 오후 , 길목에서 붉은색의 4 륜 전동차를 탄 어르신이 회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 올해 여든 셋의 나이로 큰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최월임 (83) 어르신은 항상 미소를 띠고 있는 선한 인상이다 .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을 그려내듯 선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 어르신의 눈가에도 , 입꼬리에도 자주 짓는 미소를 따라 곱게 주름져있다 . 늘 밝게 웃는 월임 어르신의 인생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 그 시절 누구나 그러했듯 그의 인생에도 굴곡이 있었다 .
서른넷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시어머니와 함께 키웠다 . 집안일은 시어머니가 도와줬지만 돈벌이는 온전히 월임 어르신의 몫이었다 . “ 시방 우리 막둥이가 돌이었을 때 돌아가셨으니까 올해로 딱 50 년 전 일이야 . 초상집에 갔다가 식중독에 걸려서 그만 돌아가셨어 .
그래도 시어머니가 우리 애들 돌봐주느라 욕 봤지 .” 그는 아들 둘 , 딸 둘의 사남매를 키우기 위해서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다 . 젊을 때는 전주 중앙시장에 나가서 건설 현장에서도 일했다 . 시멘트를 등에 지고 5 층을 오르내리고 타일 붙이는 데 보조를 서기도 했다 .
산에서 고사리나 나물들 캐다가 팔고 병아리 장사도 했었다 . “ 애들 갈칠라고 한 거지 . 버스타고 1 시간이면 중앙시장에 도착해 . 일손 필요한 곳 가서 뒷모도 ( 현장에서 잡일을 도맡는 일 ) 하면서 시멘트 떠주고 구르프 ( 헤어롤 ) 찍는 데 가서 구르프도 만들고 .
로컬푸드 생기기 전까진 모악산 앞에서 노점해서 채소들도 팔았지 .” 자식들은 중학교까지는 구이면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부터는 전주로 나갔다 . 매일 4 인분의 도시락을 만들고 수학여행도 한꺼번에 보내느라 목돈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 하루하루 버텨냈던 그 시절 .
그럼에도 월임 어르신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때로 꼽는다 . “ 편안하긴 지금이 편하지만 난 애들 키울 때가 제일 재밌었어 . 일과 끝내놓고 방에다 애들 뉘어놓고 새근새근 자는 모습 보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 난 그때가 행복했어 .
고생은 실컷 했어도 애들이 착해가지고 잘 되는 모습 보고 사는 게 진짜 행복이지 .” 현재 월임 어르신 곁에는 큰아들이 있다 . 어르신은 아들과 함께 700 평 규모의 밭에서 난 채소들을 로컬푸드 직매장에 판매 중이다 .
일머리가 좋아 수익을 잘 높이는 아들을 든든해하며 어르신은 아들 자랑도 슬쩍 내비췄다 . “ 컴퓨터에다 심는 거 , 수확하는 거 다 적어놓고 때에 맞춰서 해 . 어느 때 무슨 비료를 주고 약을 주는지도 척척 다 알아서 동네 사람들도 우리 아들한테 물어봐 . 머리가 영리해가지고 농사를 잘 해 .
농사박사야 박사 (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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