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니 받거니 봄은 사람에게서 피어나네 할머니는 시집와 돌담쌓고 다람쥐는 금낭화 퍼뜨리고 전날까지 세차게 불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 바람이 숨을 죽이니 비로소 느껴지는 완연한 봄 .
햇살도 좋고 , 길을 따라 난 꽃도 어여쁘고 , 이래저래 좋은 그런 날 , 우리는 동상면 사봉리 시평 ( 詩坪 ) 마을로 향했다 . 동상으로 가는 길목 , 마을을 둘러싼 온 지천이 연녹색으로 가득이다 . 요즘 동상면은 만경강 발원지인 밤티마을의 석산 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보인다 .
도로와 마을에 내걸린 반대 현수막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 돌담 따라 꽃길 따라 봄에 취해 봄의 기운으로 활기차지만 평화로운 어느 오전 , 연석산의 넉넉한 품 안에 자리 잡은 시평마을은 어여쁜 돌담이 인상적이다 . 돌담을 따라 걷다 금낭화 꽃길을 발견했다 .
그 끝에는 파란색 지붕의 집이 한 채 . 권주택 (77) 할아버지의 집이다 . 할아버지가 언젠가 집 근처에 금낭화 한두 개를 심었던 것이 어느새 길을 따라 퍼졌다 . “ 다람쥐가 열매를 옮겨 다니면서 이렇게 퍼졌어요 . 사람이 일부러 심으면 이렇게 예쁘게 안 되거든요 .
옛날엔 다람쥐가 참 많았는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요즘엔 도통 보기 힘드네요 . 이 집은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 이 집서 옛날에 여덟 식구가 살았어요 .” 할아버지 뒷집에는 정만순 (84) 할머니가 살고 있다 . 할머니가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남편과 돌담을 쌓았던 기억이 난다 .
열일곱에 시집을 왔으니 돌담의 나이가 얼추 65 살은 더 된 셈이다 . “ 시집와서 이 집서만 살았어 . 친정도 동상이니까 난 평생을 동상에서만 산거야 . 마당에 핀 꽃 이름은 잘 몰러 . 다 내가 심은 거지 . 저 빨간 꽃도 좋아하고 파란 꽃도 좋아해 .
오늘처럼 날 좋으면 이렇게 마당서 꽃구경 하면서 시간 보내 .” 할머니 마당 안쪽에서 여리고 순한 두릅을 땄다 . “ 할머니 , 점심에 드시면 되겠어요 ” 라며 건네자 말없이 검은 봉지에 두릅을 담아주신다 . “ 난 괜찮아 . 갖고 가서 먹어 .
맛있을 거야 .” ■ 산나물 다듬으며 막걸리 마시는 일상 달달달 . 어디선가 경운기 소리가 들린다 . 오종태 (85) 할아버지가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던 길이다 . 그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
마당 파릇한 잔디 위에는 나른한 멍멍이가 , 부엌에는 아내 이덕순 (75)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전주서 살던 할머니는 처음 이 마을로 왔을 땐 갑갑했단다 . “ 앞에 산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오래 살다보니께 괜찮아지더라고 . 여긴 병원도 없고 교통도 안 좋아 .
병원 갈람 모래내로 가야 되고 .” 부부가 젊을 적엔 마을이 북적거렸다 . 마을 규모가 컸고 , 또래들도 많았다 . 낮에는 열심히 일 하고 밤에는 다함께 모여 술 마시며 놀던 재미있던 시절 . 지금은 낮이건 밤이건 마을이 고요하다 . 젊었던 부부도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됐다 .
“ 어떤 애기한테 우리 가난할 적 얘기해주니 그러더만 . 라면이라도 삶아먹지 그랬냐고 . 그때 라면이 어딨간 . 그거 들음서 시대가 바뀌었다고 느꼈다니까 . 우리 때는 부잣집 가서 나무 일하고 나락 베는 일 하면서 먹고 살았거든 . 젊은 아가씨가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네 .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에 눈이 간다 . 박정남 (74) 어르신 집이다 . 정남 어르신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삼아 아침에 산에서 캐온 다래순을 다듬고 있었다 . 능숙하게 흙을 툭툭 털어 칼로 꼭지를 딴다 .
합다리순 , 취나물 , 고사리 . 모두 오늘 아침에 캐온 봄나물들이다 . “ 오늘 아침 8 시 반에 산에 올라가서 캐온 거야 . 고사리가 생각보다 많이 없더라고 . 이렇게 산에 가서 나물 캐오는 게 요즘 재미지 . 나물이 향이 참 좋아 . 다래순은 무쳐 먹고 합다리순은 국 끓여먹으려고 .
옛날에는 우리 시어머니가 나물을 캐다 주셨어 . 그때도 취나물 , 두릅 , 고사리 뭐 이런 거였지 . 잘구 ( 자루 ) 에 넣어서 이 ~ 만큼 캐오셔 . 그거 가지고 시장에 팔러가기도 했었네 .
다 옛날이야기야 .” 마을 어귀로 마실을 나온 정숙희 (65) 씨도 아침에 고사리를 삶아 놓고 나온 참이다 . “ 집 뒤에 갔더니 누가 고사리를 먼저 끊어갔더라고요 . 한 주먹 나오길래 삶아 놓고 왔어요 . 저는 재작년에 이 마을로 귀촌했는데 조용하고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좋아요 .
아침저녁이면 산새 소리가 들리는 곳이에요 .” 숙희 씨가 오자 안방에 있던 손영만 (80) 할아버지도 얼굴을 비추신다 . 갑작스레 열린 조촐한 막걸리 파티 . 안주는 삶은 달걀과 김치가 전부지만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웃음이 그 상의 빈자리를 가득 채운다 . 언제부터였을까 .
봄을 풍경이 아닌 사람에게서 보게 된 것이 . 시평마을 사람들의 하나같이 말간 얼굴과 생기 있는 목소리 , 그리고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반겨주는 그 마음이 봄처럼 맑고 눈부시다 . 막걸리 한잔 시원하게 들이켠 정남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 “ 그나저나 아가씨 ! 고마워요 .
이런 집인데도 놀러 와줘서 . 하하하 ” [ 시평마을은 ] 행정구역상 시평과 황조리 , 연동마을 3 개가 한 마을이다 . 과거 사람이 많이 살던 시절에는 시평에만 50 여 가구가 살았지만 현재는 3 개 마을을 통틀어 35 가구 , 70 여명이 거주한다 .
논밭이 많지 않은 지역 특성상 산전 ( 山田 ) 을 일궈 감자나 메밀 등을 심었고 , 산에서 감을 수확해 먹고 살았다 . 최근에는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고추나 들깨 등 밭농사만 조금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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