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확인받는 공간, 밭 흙을 만져야 마음이 편안 임병록 어르신 밭을 일구는 임병록(79) 어르신은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밭에 나선다. 해가 조금만 올라와도 모자 깊이 눌러 쓰고 고무장갑을 낀 채 모종을 손질한다. “밭일은 내 몸이 아는 일이여.
움직여야 살겄어.”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에 오늘은 부지런히 심어야 한다며 새벽부터 밭고랑을 뒤적였다. 요즘 어르신이 특히 애정을 쏟는 건 노란 꽃 피는 황매화(黃梅花)다. 작년 봄 밭 한쪽에 묘목을 심어 올해 두 번째 봄을 맞았다. 황매는 손이 덜 가는 대신 인내심이 필요한 작물이다.
“물이 많은 걸 싫어해. 더워도 끄떡없고 비만 너무 안 오면 돼. 3년쯤 키우면 팔 수 있지.” 어르신은 이 꽃을 두고 ‘속 편한 작물’이라 부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도 조급해하지 않고 꽃이 피는 그날까지 묵묵히 돌본다. 과거에는 철쭉도 가꿨다.
분홍빛으로 화사하게 피어나던 철쭉은 보기 좋았지만 일이 많았다. 해마다 손이 더 가면서 언젠가부터는 지친다는 생각이 앞섰다. “철쭉은 곱지만 나한테는 이제 무리야. 이제는 실한 거 먹을 거만 하자고 마음 먹었지.” 그래서 어르신 밭에는 지금도 참깨, 들깨, 생강, 쪽파 같은 작물이 자라고 있다.
판매 목적이 아닌 먹을 만큼 농사짓는다. 손자들과 며느리 자식들 밥상에 올라가는 채소들이다. “내가 길러서 내가 먹고 식구들 나눠주는 맛이 최고여.” 밭은 어르신에게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곳이 아니다. 계절을 느끼고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흙을 만지고 날씨를 살피고 식물의 숨결을 느끼는 일이 매일 이어지는 삶의 리듬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이 먼저 가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죽절마을의 풍경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사람이 줄어들었어. 밭도 놀고 빈집도 많고.” 하지만 어르신은 그럴수록 밭을 더 다듬는다.
흙이 있어야 하루가 편하고 밭일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 도시에서 지내는 자식들이 고생 말라며 손을 놓으라 해도 어르신은 고개를 젓는다. “밭일이 고되긴 하지 그래도 이게 내 건강이야. 안 움직이면 몸이 금방 상해.” 밭을 일구며 살아온 시간만도 60년이 훌쩍 넘었다.
황매화처럼 물이 많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라난 인생. 마을과 땅 가족과 함께 쌓은 시간은 고요하지만 단단하다. 어르신은 오늘도 천천히 계절을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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