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칠성클럽 다 떠나고 이제 남은 건 둘" 일곱 동갑내기 하루가 짧다 어울려 다리목마을은 천주교의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 피정의집이 있고 옛 공소 ( 公所 _ 본당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 자리가 남아있다 . 이 공소 자리에는 김인석 (81) 할아버지가 산다 .
할아버지의 집 외관에는 십자가와 ‘ 천주교 다리공소 ’ 라는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 십자가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가면 깔끔한 내부가 나온다 . 이 마을에서만 나고 자란 할아버지의 집이다 . “ 이 집서 혼자 살아요 . 손주 한 명이랑 같이 살았는데 지금 군대 갔거든요 .
혼자 있다 보니 쓸쓸할 때가 있어요 . 올해 12 월에 손주가 제대하는데 요즘은 그날만 기다려요 .( 웃음 )” 한지공장이 있던 마을답게 할아버지도 젊을 때 한지를 만들었다 . 한지장판 만드는 일을 했고 , 이후에는 밭농사를 지었다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올라가 나무도 많이 했다 .
하루에 두 차례 지게를 짊어지고 올라 다녔던 일이 생생하다 . 그때에는 마을에 동갑내기가 7 명이나 있어서 하루가 짧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 일곱 명의 동갑내기라 ‘ 칠성클럽 ’ 이라 불렀다 . “ 옛날에는 재미있었죠 . 나랑 동갑인 청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우리를 칠성클럽이라고 했어요 .
마을에 주막이 두 군데 있었는데 거기에서 술도 마시고 재미있게 놀았죠 . 건장한 청년들이 함께 다니니까 무서울 게 없었어요 . 지금은 다 떠나고 마을에 저를 포함해 두 명 남았어요 .” 인석 할아버지도 천주교 신자이다 . 부모님이 천주교를 믿었고 , 자신의 자식들도 천주교를 믿는다 .
과거에는 전주에 있는 중앙성당을 다녔고 , 노송성당을 다니다 인후동성당을 다녔다 . 이후 소양성당이 생기면서 마을의 공소가 없어졌다 . “ 공소가 나 열여섯 정도에 생겼어요 . 그 전까지는 성당가려면 전주로 갔죠 .
마을에는 버스가 없어서 재 넘어서 송광사로 가면 거기에 작은 마을버스 같은 게 있었어요 . 그 버스도 없으면 걸어갔어요 . 전주까지 30 리 걸어서 성당을 간 거예요 .” 마을주민 대다수가 천주교민이다보니 성당 가는 길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갔다 . 힘든지도 몰랐다 .
“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다보니 힘들 일이 뭐가 있겠어요 . 평일이고 뭐고 아무 때나 시간될 때 성당에 갔어요 . 그래도 공소가 생겼을 땐 좋았죠 . 가까우니까요 .” 김인석 할아버지가 활동수첩과 미사관련 책자를 보여주신다 공소에서는 매주 수요일 아침 10 시에 미사가 있었다 .
지금은 인석 할아버지의 집인 이 공간에서 마을주민이 모두 모여 미사를 지냈다 . “ 당시에는 전주중앙성당에서 신부님이 오셨어요 . 한 시간 정도 미사를 했죠 . 신부님이 못 오시는 날이면 공소회장이 미사를 했는데 그때는 영성체는 안 줬어요 .
미사가 끝나면 각자 집으로 갈 때도 있고 특별한 날이면 밥도 같이 먹었어요 . 성탄절이면 가장 큰 행사잖아요 . 그때가 되면 전주 쪽 성당에 가서 아이들은 율동도 하고 그랬어요 . 재미있었죠 .” 오랜만의 과거 이야기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할아버지는 열아홉 , 스무 살의 젊은이로 돌아가고 싶다 . “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 그 나이면 혈기왕성하잖아요 . 내가 스물한 살에 결혼했거든요 . 아내도 이 마을 사람이었어요 . 우리 처형이 지금 옆집에 살아요 . 요새는 일요일이면 처형네 하고 같이 소양성당에 가요 .
성당 갈 때가 요새는 가장 분주한 날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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