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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공동체 · 2019.10.14

나의 ㅇㅇㅇ

① 임예빈 '나의 엄마 지은솔'

사람들이 함께 웃고 배우며 살아가는 공동체 현장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등록 2019.10.14 16:39 조회 2,7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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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은솔 밭을 일구는 나의 작은 거인 생산라인을 담당하는 회사 일을 마치면 지은솔 (55) 씨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 치매가 온 늙은 노모를 살피고 나면 밭에 갈 채비를 한다 . “ 엄마를 보면 생각이 참 많아져 . 저게 바로 내 모습인데 마음이 아프지 .

엄마 생각해도 눈물 나고 우리 자식들 생각해도 나는 눈물 나 .” 그의 밭은 작물이 없을 때가 고작 겨울 한 철뿐인데 , 들깨 , 서리태 , 파 , 땅콩 , 고구마 , 고추 , 옥수수 , 가지 , 토란 , 양파 , 마늘 , 단삼 , 감자 , 아마란스 , 호박 , 굼벵이동부 , 강낭콩 , 돼지감자 , 감 등이 1 년 동안 은솔씨가 일구는 땅에서 나오는 작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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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도 많아서 기억이 안 난다며 작게 웃어 보였다 . 임예빈씨의 엄마 지은솔씨는 퇴근후 밭으로 나와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땅을 그냥 두는 법 없이 자투리 공간이 있다면 뭐든 심고 본다 . 12 마지기 , 그가 혼자 일궈내는 땅이다 . 혼자 일궈내려면 당연히 힘에 부칠 것이다 .

그러나 못해 , 안 해 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농사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형제자매 , 그리고 자식들 조금씩 나눠주려는 마음도 있다 . “ 도시는 이런 데 마트에서 사면 비싸게 팔아 . 그러니까 조금씩 보내 주는 거지 .” 은솔씨는 농사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적이 있다고 했다 .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했을 적에 처음으로 병 하나 없이 잘 되었다면서 그날을 회상했다 . 지은솔씨는 10 명의 형제들 중 6 째로 태어났다 . 대를 잇는 것만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다보니 지금의 수에 이른 것이라 말했다 .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너무 좋아서 “ 우리도 남자있다 ” 라고 외치면서 마당을 뛰어다녔다고 . 그 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대문에서 남대문으로 나가는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 그 시절에는 다들 그러했고 , 형편 또한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 “ 내가 그때는 진짜 너무 말랐었어 .

셋째언니 결혼식 때 엄마랑 언니 , 동생들이 날 보고 많이 울었어 . 얼마나 말랐는지 계단을 내려가다 헛것이 보여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잖아 . 그때 보니까 손목뼈가 튀어나왔더라고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 창피한 것만 생각나서 안 갔어 .

아가씨 때라 뭘 몰랐었으니까 .” “ 밤까지 일해야 되고 남대문 가려면 단추를 달아야하고 그러잖아 . 그때는 내가 미싱을 안 하니까 시다 ( 심부름꾼 ) 해줬지 . 그때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온 사람도 있었어 . 졸업안하고 온 사람도 있고 , 그런 애들은 너무 애기니까 심부름 시켰어 .

미싱 하는 사람 있잖아 미싱사 한명 당 심부름 하는 애 1 명씩 있고 그렇게 20 벌 코트를 한 조가 완성을 시키는 거야 . 잘 나가면 옷이 200 벌 나가고 그랬지 . 시다도 못하고 그러면 미싱사가 때리고 그랬어 . 나는 그 언니를 잘 만나서 맞고 그러진 않았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

근데 내가 또 그 애들 중에선 언니니까 옛날 쿠커 알지 쿠커 . 거기에 부침개 같은 거 하면 같이 먹고 그랬지 .” 많은 소녀들은 밤낮으로 옷을 만들며 , 차디찬 스펀지 한 장만이 놓아진 바닥에서 쪽잠을 자야만 했다 .

그곳의 어린 소녀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아마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교육을 받지 못했던 한 , 배우고자 하는 갈망도 깊어져 갔을 것이다 . 지은솔씨도 그러했다 . 그렇게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미아리의 다른 봉제공장으로 옮겼다 . 하지만 그 봉제공장 역시 환경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무작정 친구와 인천으로 떠났다 . 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 인생은 고달파졌다 . 좋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생기자 결국 돌아갈 곳은 완주뿐이었다 . “ 여기에 내려왔을 때 제일 힘들었어 .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어 .

자식 둘을 책임을 져야하니까 앞이 하나도 안보이고 몸도 아파서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 그래도 내가 낳은 자식들 책임을 져야겠다 . 그런 생각으로 온 거야 . 그래서 마음을 닫고 살았지 . 나는 작아도 짊어진 게 많아서 내가 너무 버거워 .

그래서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야 .” 살면서 했던 일들을 모두 말해보라고 하자 세탁소 , 그릇 파는 영업사원 , 안경집 만드는 일 , 조화 붙이는 부업 , 가지 하우스 , 5 개의 음식점 , 지금의 회사를 다녔다고 설명했다 . “ 나는 한평생 일만하고 사네 .

앞으로는 노래로 봉사도 하고 싶고 , 드럼도 배우고 싶고 많이 배우고 싶어 .” / 이 글은 완두콩을 좋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대학생 임예빈 (21) 씨가 자신의 엄마를 직접 취재해 쓴 글이다 .

현장 사진

① 임예빈 '나의 엄마 지은솔' 사진 1

첨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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