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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0.11.12

평생을 일하며 얻은 것들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0.11.12 17:54 조회 1,29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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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평생을 일하며 얻은 것들 - 소양 평리마을 곽옥희 시간이 가면 봄 , 여름 , 가을 , 겨울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때가 되면 땅에서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하늘에서는 눈과 비가 내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들이 요즘은 눈물 나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

지난 봄 내내 미세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뒤덮었고 여름엔 장맛비가 쉼 없이 내렸다 . 코로나를 피하려고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낯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올 가을에는 나락이 익고 단풍이 빨갛게 물들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도 산에는 단풍이 들었고 들에는 수확이 한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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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마주하는 가을 풍경이지만 올해는 때가 되서 그렇게 찾아와 준 가을이 더없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 11 월에 접어든 어느 날 , 소양면 산소골 집 앞 텃밭에서 생강을 캐고 있는 곽옥희씨 (66 세 ) 를 만났다 .

그녀는 막 캐낸 생강의 알싸한 향기와 함께 평생을 일하며 귀하게 얻은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딸이 이제 그만 일하라고 말려요 . 그런데 일 한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 안 좋은 생각만 떠올라요 . 막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해요 .

그래서 닥치는 대로 어디 일하러 오라고 하면 사람 모아서 데리고 가서 일하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 젊었을 때는 돈 버느라 그렇게 일했지만 지금은 돈 보다는 내 마음 편 하려고 일하는 거야 . 평생을 쉬어보질 않아서 쉬는 게 어색하지 . 내가 번 돈은 정말 떳떳한 거야 .

이 작은 몸으로 일해서 한푼 두푼 모아서 통장에 모아놓은 것이 참 뿌듯하더라고 . 내 돈으로 손자들 맛있는 거 사줄 때 그때 좋더라고 . 용돈도 주고 .

그때 참 행복해요 .” 평생을 쉬어보지 않아서 쉬는 게 어색하다는 곽옥희 씨, 그녀가 평생을 일하며 귀하게 얻은 것들은 무엇일까 곽옥희씨의 고향은 이곳 소양이다 . 오남매 중에 셋째였고 외동딸이었다 .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해서 열아홉에 동네 친구들과 전주역까지 걸어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

미싱공장에서 속옷 미싱하는 일을 하다 결혼을 했고 딸내미 세 살 , 아들네미 두 살 때 다시 고향 소향으로 내려왔다 . 그때부터 식당일 , 벌목 , 옷 장사 , 포장마차 , 복숭아 농사 , 삽목 같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오며 살아왔다 .

힘들었지만 그 시절 엄마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 뭐든지 해야 했다고 한다 .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 왔으니 이젠 좀 일을 덜어도 될 테지만 권옥희씨는 지금도 몸을 놀리지 않고 일을 해야 더 편하다고 한다 . “ 딸 하나 아들 하나 연년생으로 낳았는데 지금은 딸 하나만 있어 .

우리 아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 . 군대 제대할 날짜 남겨놓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 차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지 . 우리 아들같이 좋은 아이가 없었어요 . 참 잘생겼어요 . 나는 못생겼는데 우리 딸이랑 아들이 예뻐 . 아들 하늘나라 가고 나서 일주일 만에 큰 손자가 태어났어요 .

그러니 우리 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 자기 몸은 만삭인데 동생이 그렇게 됐지 , 엄마는 밥도 안 먹고 몸져 누워있지 . 우리 아들을 대천 앞바다에 뿌려줬거든 . 우리 아들이 친구들이 참 많더라고 . 형들도 많고 .

고등학교 선생들 찾아오고 군대에서도 높은 사람들도 찾아오고 , 우리 아이가 참 착했어요 . 고등학교 때도 알바해서 나한테 90 만원을 가져다주데 . 우리 아들 주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참 많이도 찾아왔어 . 우리 아들이 생전에 좋은 사람이었었나 봐 .

쉬고 있으면 아들 생각이 나서 차라리 일하고 있을 때가 더 편해 .” 십구 년이 지났지만 먼저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더 할 수 없다고 했다 . 아들이 떠나던 해에 새로 집을 짓고 딸의 가족들과 살림을 합쳤다 . 아들은 손주를 남겨놓았고 이듬해에는 딸에게서도 손주가 태어났다 .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힘내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이유들이 생긴 것이다 . “ 고향으로 내려와서 안 해본 일 없어 . 식당일도 다니고 산에 벌목하러 다니기도 했어 . 봄에는 삽목하러 다니고 가을에는 양파모종도 심고 전에는 장날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옷장사도 했지 .

처음에는 수줍어서 팔지도 못했어 .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 엄마들은 뭐든지 다해 . 닥치는 대로 다 해버렸어 . 그 뒤로 식당일을 했지 .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니까 알짜 돈이 모아지더라고 . 내가 그 전부터 사람들 모아서 일하는 것을 잘했어 . 일종의 작업반장이지 .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일 필요하면 나한테 전화가 많이 와 . 어디에 일 있다 하면 내가 동네사람 모아서 단체로 일하러 다니는 거지 . 아들 보내고 이집을 짓고 딸이랑 같이 산거야 . 그 해에 참 많은 일이 있었어 . 아들 가고 손주 태어나고 집 지어서 함께 살면서 아픔을 치유하면서 살았어 .

손주들 키우면서 사랑을 온통 쏟아 부었지 . 그러면서 사니까 응어리들이 많이 풀어지더라고 . 나도 딸한테 의지를 하고 딸도 나한테 의지를 하고 서로 무너지지 않게 의지하며 살아난 거야 .

딸이 없으면 허전해 .” 그렇게 속절없이 아들을 떠나보내고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온 곽옥희씨는 그래도 담담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 사랑하는 딸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주 준석이 , 수민이가 곁에 있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만 아직 제 힘으로 해나갈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

“ 나름대로 배풀고 살다보니까 사람이 내 옆에 붙어 . 수양딸을 삼은 딸이 두 명이나 있어 . 이상하게 수양딸이 삼아지데 . 전주 평화동 사는 수양딸은 우리 딸 친한 언니인데 , 우리 아들 장례식장에서 남인데도 집에 가지도 않고 삼일 동안 일손을 도와주네 . 그 아이가 나를 엄마 삼고 싶데 .

그래서 수양딸 삼은 거지 . 그리고 또 한 수양딸은 예전에 예향가든 앞에서 붕어빵을 팔았어 . 인천에서 살던 애여 . 하던 사업이 망해서 도망치듯 여기로 내려와서 붕어빵을 판 거지 . 째깐애 들쳐 업고 장사를 하더라고 . 그래서 그 아이를 내가 봐줄 테니 우리 집에 두고 일하라고 했어 .

그게 고마웠는지 엄마 삼고 싶다고 . 그래서 수양딸이 또 생긴 거지 . 이날 까정 친정 엄마처럼 돌봐주고 . 얘네들도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따라 . 아들 떠나고 생긴 인연들이야 . 전 같으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그렇게 엮일 일이 없잖아 .

아들 보내고 나니까 다 돌봐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그랬어 . 아들은 먼저 갔지만 우리 딸 있지 . 수양딸이 둘이나 생겼지 . 손자들 준석이 수민이 있지 .

나는 참말로 든든해 .” 오래 전 어느 날 , 열아홉 살 시골 아가씨가 보따리 하나 싸매고 소양에서 전주역까지 걸어가며 서울로 돈 벌러 가던 그 길을 어렴풋이 따라가 본다 .

그 아가씨가 미싱 공장으로 , 식당으로 , 시장으로 , 산으로 , 들로 돈 벌러 다니던 그 오십년의 세월을 아득하게 더듬어 본다 . 아들을 잃던 날과 새집을 짓던 날 , 손주들이 태어나던 날과 새로 맺어진 수양딸들의 손을 잡아보던 그 애틋한 날들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천천히 떠올려 본다 .

평생을 힘들게 일하며 그녀가 얻었던 그 귀한 것들이 앞으로도 오랜 동안 그녀 곁에 함께 있어주길 소망한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평생을 일하며 얻은 것들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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