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쟁이 막내딸의 소박한 치유법 시골에 와 보니 여기야 말로 살아있는 대학 병들고 지친 사람들 치유하는 것 돕고 싶어 - 고산면 이현귀씨 ‘ 아파야 산다 ’ 는 말이 있다 .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아픔 속에 삶의 이유와 조건이 담겨져 있고 그것으로 인해 결국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
누구라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몸도 마음도 우리는 대부분 크고 작은 아픔들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 되던 해 겨울 , 단돈 삼천원을 들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던 이현귀 해설사 (63 세 .
완주군 문화관광해설사 ) 가 들려준 삶의 풍경은 아픔을 드러내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여정이자 새로운 삶의 근거를 만들어 가는 치유의 이야기들이다 . “ 우리 엄마가 토요일만 되면 멀쩡한 이불을 뜯었어요 . 그러면 삶아서 풀 먹이고 다듬이질 하고 꼬매야 학교를 가잖아요 .
책 못 들여다보게 시간을 뺏었어 . 딸이라고 안 가르친다고 . 어린마음에 집에 있으면 일만하다 끝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는 생각 때문에 그 고마운 엄마가 미워지더라구요 . 엄마는 공부 못하게 책 뺏고 저녁이 되면 불을 못 켜게 하고 그랬어요 .
중학교 시험보러 가는데 내 뒤꼭지에 대고 저년은 보나마나 떨어질거라고 그랬어요 . 나 기죽이느라고 .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씩씩거리면서 시험을 보러 갔지요 . 그 어느 누가 너 시험 잘봤냐 물어보는 사람 없었어 . 가족들이 아무도 관심도 없었지 . 내 번호가 162 번이었어 .
학교 합격되었다는 소리 듣고 우리 엄마는 근심걱정인거지 . 저것을 어떻게 가르치나 하고 .” 그 고마운 엄마가 그렇게까지 막내딸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는 것을 못하게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집과 전답을 처분했고 엄마의 바느질 품팔이로 살림을 이어갔다고 했다 .
가르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자식들에게 더 모질게 대한 것이다 . 이현귀씨는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셋째 언니가 친척에게 몰래 얻어다 준 삼천원을 들고 둘째 언니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
“ 우리 때는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졸업하면 식모살이 했어요 . 그게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 아침 일찍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 그 어린 것들이 다 그런 일들을 했어요 . 그때는 서울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어요 .
기차타고 갈 때 눈이 내렸던 기억이 나네요 .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 와이셔츠 실밥 떼는 일 . 내가 솜씨가 좋으니까 와이셔츠 포장하는 일을 하게 되었죠 . 샘플실에서도 일하고요 . 내가 엄마 닮아서 솜씨가 있어요 . 우리 엄마가 그 당시에 마을에서 폐백음식을 다 했어요 .
고산 읍내에 바느질쟁이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 우리 엄마가 인기가 제일 좋았어요 . 고향에 다시 내려왔을 때 고산 양로당에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소개하기를 바느질쟁이 막내딸 하니까 다 나를 알아보시더라구요 .” 서울살이는 솜씨 좋고 욕심 많았던 그녀를 서서히 병들게 했다 .
스물넷에 수원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둘째를 낳고 나서부터는 몸의 반쪽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 잘 맞지 않았던 서울살이와 힘들었던 결혼생활로 인해 그녀의 몸에 당시에는 병명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퇴행성 질환이 찾아온 것이다 .
병원을 전전하고 너무 힘들 땐 모진 생각도 했지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책이 그녀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했다고 한다 . “ 그 당시 유태종 박사가 쓴 책을 읽었는데 마트에서 파는 된장 , 고추장 먹어서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 아 그래서 시골에 가자 .
고향에 가서 콩 농사지어서 고추장 된장 담가서 살자 마음을 먹은 거에요 . 마흔두살 때였어요 . 그때 오산리에 땅을 샀어요 . 그 땅에 매실나무가 600 주가 있었어요 . 그래서 내 별명이 매실아줌마가 된 거에요 . 그때 내려올 때만 해도 우울증이 심했어요 .
그런데 매실나무 600 주 가꾸다 보니까 매일 나무랑 씨름하고 나무들이랑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몸도 건강해지니까 밖에 나와서 일할 생각을 한 거죠 . 쉰 넘어서는 완주문화원을 통해 문화관광해서 일을 시작해 십년 넘게 하고 있어요 .” 이현귀씨는 완주군에서 내로라하는 마당발이다 .
로컬푸드 직매장에 납품하는 농부이고 삼례문화예술촌에서 활동하는 문화관광해설사이고 봉동 , 운주 , 화산 , 고산에서는 소문난 요가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다 . 문화관광 , 공동체 , 로컬푸드를 비롯해 최근 지역에 만들어진 새로운 정책이나 사업을 공부하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함께 했다 .
지금은 농업대학에서 농업치유체험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 “ 십년 동안은 수원하고 완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다 2009 년에 보따리 싸서 완전히 정착한거죠 . 문화관광해설사 시작하고 요가 강사도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요가가 익숙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
둔산리 코아루 아파트 경로당에서 처음 시작 했는데 어르신들 요가 수업하러 가면 노래수업이나 하자고 그러던 시절이었죠 . 요가 시작한 것도 제가 아파서 시작 했어요 . 요가를 배우니까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참 편해졌어요 . 남들은 내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안 믿어요 .
그런데 제가 심장도 안 좋고 운동 안하면 몸이 금방 굳어져서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어요 . 그리고 완주군에서 교육받고 그랬던 것이 지금의 밑거름이 된 거 같아요 . 제가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시골에 와보니 이곳이 대학이에요 . 살아있는 대학 . 지금도 시간만 나면 농업대학을 다녀요 .
농업치유체험과라고 있어요 . 나처럼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 오면 내가 치유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어요 .” 이현귀씨는 그래도 밭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상처받고 지치기 마련이다 .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밭으로 들어가 일을 한다고 한다 . 다행히 친구처럼 다정한 딸과 듬직한 사위가 함께 살고 있어서 각자의 일은 따로 있지만 농사만큼은 함께 짓고 같이 갈무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 완주군과 더불어 살아가며 얻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제법 많다 .
산과 강 , 들판과 마을의 풍경도 참 좋지만 식탐이 많은 나로서는 로컬푸드 직매장에서의 장보기를 그 즐거움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 직매장에는 제철에 생산되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쌓여 있고 온갖 종류의 곡물과 산야초가 구색을 맞춰 진열되어 있다 .
냉장 쇼케이스에는 어디서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모르는 음료 대신 완주군 주민들이 조금씩 생산하고 가공해 낸 건강한 가공식품들이 짜임새 있게 채워져 있다 .
뭐든지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에 완주군에서 시작한 로컬푸드 직매장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완주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만들어지는 직매장이 대세임에 틀림없다 .
왜냐하면 직매장에서 파는 상품들에는 이현귀씨처럼 소박하지만 스스로를 치유하고 다른 이들을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진짜 이름들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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