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막내아들 정신일씨, 가운데 정진섭씨와 부인 황안순씨가 46년째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는 기름집 앞에 나란히 서 있다. 기름집 인생 46년은 그래도 고소했다 고산 형제 기름집 정진섭 할아버지 무슨 일이든 몇 십 년 동안 한 곳에서 꾸준히 그 일을 해온 이들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
얼굴이 편안해 보이고 헛된 욕심도 없어 보이고 복잡한 인생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 형제 기름집 정진섭 (77 세 ) 할아버지도 그랬다 . 머뭇거리며 형제 기름집으로 처음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가게 안쪽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요구르트를 주셨다 .
잠시 앉아 있으니 지나던 동네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르고 함께 앉아서 요구르트를 마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오다가다 들르는 곳 . 꼬순내 나는 고산읍내의 형제기름집이다 . 각시 때부터 다니던 단골집이여 형제 기름집에선 10 년 단골은 명함도 못 내민다 .
40 년 지기 단골손님 엄분순 할머니는 가게 평상에 앉아 계신 폼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 정진섭 할아버지에게 물으려던 좋은 기름 짜는 비결 , 장사 비결 같은 질문은 의미 없는 물음이 되었다 . 40 년 동안 찾아오는 단골 할머니의 존재 자체가 형제 기름집의 힘 아닐까 .
기름 짜러 오신 엄분순 (76 세 )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형제기름집 칭찬을 하신다 . “ 내가 각시 때부터 기름 짜러 여지껏 와 . 진안 주천이 고향인디 그때부터 다녔지 . 지금은 전주서 사는데 1 년 3~4 번은 기름 짜러 꼭 여기로 와 . 기름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어 .
싸고 잘 짜주고 맛이 좋고 기름이 많이 나와 . 그래서 왔지 .” 지금은 고산면에 여섯 곳의 기름집이 있다 . 정진섭 할아버지가 기름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두곳 뿐이었다 . 기름 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서로 먼저 짜려고 싸움이 나곤 했다고 한다 . “ 그때만 해도 가게 안이 바글바글 했지 .
서로 먼저 짜갈라고 싸우니까 번호표를 나눠 줬지 . 기다리는 손님들을 맞은편 다방에 모셔다 놓고 찻값 내주고 그랬어 . 우리 집 덕분에 앞에 다방도 장사가 잘되었어 . 다방 마담이 고맙다고 뜨개질해서 조끼 선물도 해주고 그랬어 .” 거의 50살이 다 되어가는 깨볶는 기계.
바싹 말린 깨를 약한 불로 오래 볶아야 제대로 된 기름이지 형제기름집의 46 년 전통은 가게 안 도처에 널려 있었다 . 우선 기름 묻어 번들거리는 바닥 , 기름집과 나이가 같은 나무 돈 통 , 거래 장부들 , 재래식 유착기와 기름 때 묻은 깨 볶는 기계들이 가게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
“ 내가 돈이 없어서 옛날 기계를 쓰는 것은 아니여 . 신식기계도 써봤어 . 재래식이랑 신식이랑 써보면 신식기계가 월등하게 빠르지 . 신식에서는 2 번 짤 것을 재래식 기계에서는 1 번밖에 못 짜 . 그런데 깨 볶는 것은 옛날식이 더뎌도 제 맛이 나 . 약한 불로 오래 볶을수록 더 꼬순 맛이 나 .
기계도 기계지만 깨는 바싹 말려서 볶아야 하는 법이여 . 아무리 바싹 말려도 신식기계에 불 싸게 해서 금방 볶으면 그 맛이 안나 . 우리 집 오는 손님들은 내가 40 년 동안 주입식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참깨고 들깨고 다 바싹 말리고 와 . 바싹 말리면 1 시간 걸릴 것 40 분이면 볶아져 .
많이 볶으면 쓰고 덜 볶으면 덜 꼬숩고 그러지 . 옛날 기계로 볶아야 제대로 된 기름 맛이 나지 .” 유착기에서 고소한 기름이 나오고 있다. 기름병에 담긴 믿음의 철학 정진섭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기름집을 했던 건 아니다 . 잡화점을 하며 채소나 과일들을 팔았다 .
하던 일을 접고 업종 변경을 한 것은 종교의 영향이 컸다 . “ 우리 집이 기독교 집안이여 . 조부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 . 결혼 하고 평신도에서 교회 집사가 되었는데 일요일에 이제 문을 닫아야 하잖아 .
40 년 전만해도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가게 하는 집들은 1 년에 한 두 번 문 닫고 거의 365 일을 문 열고 장사했었지 . 근데 난 주일만 되면 문 닫고 교회 가서 하루를 쉬는 거지 . 그리고 그때만 해도 냉장고도 없고 함석집이어서 문 닫아 놓으면 바람하나 안 통해 .
내가 파는 것들이 과일 , 채소인데 토요일에 문 닫고 월요일에 문 열면 다 썩어 나갔지 . 상당히 외로운 일이었지 .” 단골들에게 햇사장으로 불리는 막내아들 정신일씨가 유착기 앞에서 참기름을 내리고 있다. 믿음이 절실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
야채 , 과일들은 썩어나가고 고민하던 찰나에 옆 기름집이 가게를 내놓고 서울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게를 인수받았다고 한다 . 46 년 전의 일이다 . “ 무슨 사업이 되었듯 정직하게 하면 다 성공하는 법이야 . 내가 여기서 40 년 넘게 장사하고 있지만 잘 되는 편이여 . 왜냐 ..
사람들이 믿어주니까 . 잔머리 굴리기 시작하면 실패하는 법이여 . 정직하게 하면 실패란 없어 . 40 년 넘게 단골이 드나드는 것도 서로 믿어주니까 그런 것이여 . 기름 짜러 오시는 나이든 어르신들은 나보고 오래오래 살으랴 . 맛난 기름 먹어야 하니께 .
여기서 먹다가 다른 집 기름 먹으면 껄쩍 지근하디야 .” 성분표와 원산지 표시 없는 빈 소주병에 담겨진 할아버지의 기름이 40 년 넘게 팔리는 비결은 과학적인 근거나 세련된 마케팅 때문이 아니었다 .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오래된 방식으로 느리게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
할아버지는 틈틈이 ‘ 저거 잘 봐라 ’ 를 외친다 . 2 년 전부터 기름 짜는 일을 배우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기계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다 . “ 얼마 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어지간한 일은 아들이 다 하고 있지 . 도와주다 보니까 그냥 하게 되는 거지 .
나 없어도 기름도 혼자 다 짜고 그래 .” 손님들은 아들을 햇 사장이라고 부르고 할아버지를 묵은 사장이라고 부른다 . 묵은 사장의 46 년 기름집도 고소했지만 햇 사장의 46 년도 지금처럼 꼬순내나는 인생이 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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