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사는 인생 , 유쾌하게 가는 거야 . - 고산면 화정마을 최은주 할머니 이야기 사람을 만날 때 그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성분들을 떠올려 본다 . 떠올린다는 것은 생물학적 요소를 분석한다기보다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행위와 같다 .
켜켜이 쌓인 비슷한 띠의 모양 속에서 옹이를 발견하고 그 옹이로 인해 변형된 모양을 들여다보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 그 사람이 자주 쓰는 단어 , 자주 짓는 표정 , 웃음소리 , 걸음걸이 , 뒷모습 등을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용하게 들여다본다 . 그러다보면 그에게 감응되고 마는 것이다 .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행위가 상대를 이해하는데 좋은 훈련이 되어왔다 . 화정리 골짜기에서 50 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최은주 (48 년생 ) 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
조용히 들여다보고 말 것도 없이 그의 이야기에 압도되어 어느 순간 학교를 가고 싶던 십대시절 그의 곁에 앉아 있기도 하고 , 생강을 이고 지고 고개를 넘던 서른 살 무렵의 그의 곁에서 함께 걷기도 했다 . 이야기가 생생해서 그 시절의 소리와 냄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학교 가는 아이들이 뛰어가면 찰랑찰랑 소리가 났어 . 그 소리가 참 부럽더만 . 책이랑 필통을 책보로 싸서 옆구리에 딱 메고 뛰어가면 필통 속 연필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 .
봄이 되면 소풍간다고 ‘ 날라아 새들아 푸른 하늘을 ’ 노래를 부르면서 줄을 서서 가는데 내 나이 여든이 다 되가는데도 그 노랫소리랑 찰랑찰랑 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네 . 학교 가는 애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지 . 우리 집이 가난하진 않았어 . 할아버지도 학자였고 배운 집이었지 .
위로 언니가 있었는데 그 당시 여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많이 배운 거지 .
근데 전쟁 통에 좀 안 좋게 되니까 할아버지가 기집애들은 절대 배우면 안 되고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해서 내가 희생양이 된 거지 .” 최은주 할머니는 익산 왕궁면 덕동마을에서 태어난 후 삼례 우석대 아랫동네로 이주해 21 살 결혼 전까지 삼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기죽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날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 작년 여름에는 유년시절 어울려 놀던 친구들과 60 년 만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 “ 나는 큰 애기들 연애편지 심부름을 주로 했지 . 삼례에 가설극장이 있었는데 오빠들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고 .
그때 함께 놀던 친구들 두 명을 올 여름에 만났어요 . 처녀 때 헤어진 이후로 일흔이 넘어서 처음 만난거지 .
삼례 살 때 우리가 어떻게 놀았냐면 밤에 내가 장화신고 남의 미나리 밭에 들어가서 베어다가 삶아서 무쳐서 함께 먹고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서리해 먹고 보리민대 ( 보리이삭을 골라 불에 그슬린 후 뜨거운 이삭을 손바닥에 비벼서 후후 불어낸 것 ) 해서 먹던 것들을 애들이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더라고 .
은주 네가 해줘서 너무나 좋았다는 말을 60 년이 지나서 들었지 . 나는 촌에 살고 이렇게 풍신나게 사는데 서울 사는 너희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지 . 그런데 시골 사는 내가 제일 재미있게 살더라고 . 서울 사는 친구들도 참 좋아보인다 그러더라고 . 내 사는 인생이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고 .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 은주 할머니의 사남매 출산한 이야기는 여느 무협지의 영웅담 못지않다 . 첫째 딸은 한동네 사는 동서가 받아 주었는데 둘째 딸과 셋째 , 넷째 아들은 은주 어르신 혼자 낳고 스스로 탯줄도 잘랐다고 한다 .
딸만 내리 둘을 낳았을 때 옆에서 시어머니가 서운해 하자 ‘ 어머니 자식 아니고 내 자식이니까 미워하지 말라 ’ 당당하게 선언을 하기도 하고 , 잘못한 것이 없는데 며느리 기를 죽이려 담뱃대로 머리를 때리려 할 때는 그것을 확 낚아채 뚝 끊어버리기도 했다 .
“ 나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자식인데 왜 욕하고 때리냐고 대들었는데 경우 없이 대들진 않았어 . 어머니도 싫진 않았는지 궁시렁 하면서도 매일 우리 집에 오셨어 . 애들도 좀 봐달라고 하면 ‘ 못 봐 이년아 !’ 하면서도 다 봐줬어 .
나 모심으러 어디 논에 가 있으면 아기 젖먹이라고 안고 오고 그랬지 .” 은주 할머니는 모든 자녀들에게 미안하지만 세 살도 안 된 막내아들 떼어놓고 돈 번다고 길을 나서던 때가 마음에 사무친다고 한다 . “ 어린 것 떼어놓고 생강 장사 다녔는데 못내 마음이 아파 .
돈 조금 벌겠다고 엄마 노릇을 못했어 . 봉동 생강을 전국으로 팔러 다녔지 . 이 일대 사람들은 생강으로 살림이 좀 폈어 . 영광 해리 , 구시포 , 법성포 , 여수 안 가본 데 없이 팔았고 주로 여수에서 많이 팔았어 . 내가 서른 살 무렵 그러고 돌아다닌 거야 .
그 당시에는 차가 없으니까 사람이 이고지고 걸어다니면서 팔았지 . 일단 생강만 차편으로 여수에 보내놓고 우리 동네에서는 4 명이 같이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가 . 그럼 먼저 도착한 생강을 나눠 짊어지고 2 명씩 흩어져서 팔러 다녔어 . 여수 시골 마을의 집집마다 걸어 다니면서 파는 거야 .
곡식으로 주면 교환하기도 하고 돈으로 줄 때가 제일 좋지 . 여수 쪽에서는 생강을 팔았고 완주 쪽에서는 주로 채반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어 . 보따리 장수마냥 . 어느 마을에 갔다가 해가 지면 혼자 사는 할머니집을 수소문해서 하룻밤 자고 가고 보리밥도 얻어먹고 다니고 그랬지 .
참 희한한 풍경이었지 . 요즘처럼 가게가 한집 건너 하나 있는 거도 아니었고 여관이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 지금 생각하면 낯선 우리를 선뜻 재워준 그 사람들 축복받아야 혀 .” 할머니의 노동연대기는 마을의 품앗이 노동에서 시작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낯선 산을 넘어 두발로 걸어 나갔다 .
도시에 공장이 생기자 두려움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 속옷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91 년에는 용진의 맥주공장에 취직해 2015 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 그 사이 한글도 배워 면사무소나 은행에서 이름 석자 당당히 쓸 수 있게 되었다 .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돌보면서도 쉬지 않았다 .
병원 5 층 건물을 청소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20 분을 걸어 첫차를 타고 용진에 내린 후 자전거를 타고 전주 송천동으로 출퇴근을 했다 . 집 근처 축사에서도 일을 했다 . 저마다 짧게는 7 년에서 9 년을 꽉 채워 일을 했다 . 노동으로만 꽉 채워진 인생이 어디있겠는가 .
할머니는 노는 것도 꽉 채워 놀아야 한다는 멋진 철학을 지닌 어른이다 . 한때는 화정리 골짜기 언니들과 어울려 양말이 닳도록 두 발을 비비며 춤추고 놀기도 하고 지금은 주로 두 발로 폐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탄다 .
집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왠지 답답한 은주 할머니는 오전에는 반드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어김없이 화정리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 한때 화정리 골짜기를 들어다 놨다 하던 그 시절의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
궁핍한 삶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 길을 홀로 결연히 걸어가는 것 보다는 함께 걸어갔던 이들 . 언제든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사람 . 최은주 할머니 같이 늙어가고 싶다 .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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