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찹고 편안한 상삼리 이발소 풍경 신창섭 이발사 이야기 용진읍 상삼리 전상삼마을에 간판 없는 이발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 나섰지만 마을 안에서 이발소가 있을 법한 건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
예전에 이 마을이 용진면 소재지였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마을에 비해 규모가 제법 큰 용진초등학교를 제외하고 그 시절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 마을 안 고샅길에서 한참을 헤매다 작고 오래된 이층 슬라브 건물을 발견했다 .
바깥에선 여기가 이발소라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이 어쩌면 이발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처음 느낌은 조금 낯설었다 .
마침 동네 어르신이 머리를 자르러 오셨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이 신창섭 (70 세 ) 이발사의 가위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 노년의 이발사와 오래된 단골손님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흑백사진처럼 평화롭고 정갈했다 .
이 건물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이발 의자에 앉아 계시던 손님이 “ 여기가 가찹고 이 사람이 동네 토박이고 그러니까 오는 거지 . 이 사람 아버지한테도 머리를 잘라봤어 .” 라고 말하며 이곳의 만만치 않은 내력을 설명해 주셨다 . “ 겁나게 오래되었네요 .
초등학교 5 학년 무렵에 시작해서 견습생처럼 아버지 일 돕고 스무 살도 안되서 가위 잡기 시작했으니까 이발 인생도 50 년이 넘었죠 . 머리 감기는 일부터 시작했지요 . 차차 면도도 하고 그러면서 가위를 잡은 거지요 .
가난해서 배움도 못 마치고 어린 시절부터 이 일을 시작했지만 , 그 시절은 다 그랬으니까 나는 당연히 부모님 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진안에서 이발소를 하셨어요 . 6.25 때 피난 오면서 여기서 터 잡고 나도 여기서 태어난 거지요 .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하셨던 건 아니고 용진면 여기저기서 하다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지 .” 작은 마을 이발소의 내력 어르신은 자기 인생을 “ 별 것 없어요 ” 라고 말씀하셨지만 ,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만이 쓸 수 있는 관용구일지도 모른다 .
초등학교 5 학년 , 열두 살의 어린 소년이 학교를 그만두고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고 그 일을 50 년 넘게 어르신의 표현대로 겁나게 오랜 동안 해온 것은 결코 별 것 없는 인생이 아니다 .
어르신은 아버지 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이발소에 담긴 내력을 담담하게 들려주셨다 . 도란스에 꽃아 사용하는 라디오와 드라이기. 기본적으로 30년은 넘은 물건들이다. “ 예전에는 용진면에 이발소가 열한 군데 있었어요 . 이곳이 용진면 소재지였으니 늘 북적댔었지요 .
여기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장사꾼들이야 뭐야 사람들로 길까지 꽉 찼으니까 .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큰 잔치였어요 . 그런 풍경이 지금은 다 사라졌지 . 그때는 학생 수도 천 명 넘을 때가 있었어요 . 한참 때는 새벽부터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렸어요 .
명절 전에는 이발하고 포마드 바르고 드라이 하고 난리였지요 . 새벽부터 밤 열두 시 넘어서 까지 머리를 깎았어요 . 그럴 때는 동네 노는 젊은이를 일당 주고 보조로 썼어요 . 그때가 한 삼십 년 전쯤 같아요 . 나도 젊었고 동네 사람들도 젊고 사람도 참 많았지요 .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부터 학교도 안 다니던 애들은 송판 위에 앉혀 놓고 머리 자르면 막 울고 그래요 . 애들 머리 솔찬히 많이 잘랐지 . 지금은 애들 머리 자르는 일은 끝났어요 .
그때 머리 자르던 애들이 다 커서 가끔씩 찾아오기도 하고 그래요 .” 이발소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가을 단풍으로 근사했다 . 예전에는 초등학교 주변으로 아름드리 벚나무가 수십 주 있었고 정문 앞에는 거창하게 큰 플라타나스도 있었다고 한다 . 지금은 다 베어지고 더 어린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
마을 안에 있는 작은 이발소지만 간판을 달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 위_ 화단의 국화와 꽈리를 근사하게 장식해놓으셨다 아래_ 이발소 앞 화단에는 철마다 나무와 꽃이 함께 한다. 가을국화가 한창이다. “ 간판이 없는 건 어차피 단골손님들이 오니까요 .
오래된 집이니까 다 여기 이발소가 있는 줄 알잖아요 . 그래도 사업자 등록증에는 태안이발소라고 되어 있어요 . 크게 편안하다는 뜻이겠지 . 우리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죠 . 오는 손님들은 정해져 있어요 .
데미실 텃골이라는 동네에서도 한 일곱 명이 꼭 이발하러 다니는데 하나는 몹쓸 병으로 세상 뜨고 하나는 아프고 지금은 다섯 명이 와요 . 여기서 살다가 임실로 이사 간 사람이 있는데 , 떠난 지가 20 년이 되었어도 전주 들를 일 있으면 꼭 우리 집에 들렀다 가는 사람도 있어요 .
보통 머리 한번 끊고 35 일 좀 지나서 다시 와요 . 올 시기가 되었는데 발길이 뜸하면 안부를 물어보지 . 그러면 병으로 세상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어요 . 마음이 참 안 좋지 . 요새는 하도 그런 일이 많아요 . 칠순을 맞이하면서 . 아이고 .
이제 이 일도 얼마 안 남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합시다 어르신의 이발소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볼수록 정겨웠다 .
요즘 미용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장치도 화려한 치장 도구도 없었지만 , 가위와 빗 하나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어르신의 손동작은 섬세하고 진지했다 . 머리 감는 작은 욕조의 오래된 타일과 플라스틱 바가지도 소박하지만 여전히 쓸모 있어 보였다 .
어르신은 예전처럼 손님이 많지 않은 요즘에는 농사일과 이발소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발소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고 한다 . “ 계속 여기 매여 있으니까 취미 생활이나 세상 구경을 못 해봤어요 .
오래된 절도 다니고 스님들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고 섬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싶은데 그런 걸 못해봐서 아쉬워요 . 날만 새면 이발소 나오고 상추 농사일도 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영부영 세월이 가서 칠십이 다 되어 버렸어 .
이발소도 쉬는 날이 있지만 , 이것만 해서 먹고 살 수 없으니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어요 . 쌈채소 농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 농사일은 주로 안사람이 하느라 욕보지요 .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오니까 문을 닫아놓기가 곤란하지요 . 꼭 돈을 벌려는 것 보다 는 고맙게 먼 길 찾아오는 손님들이니까요 .
이발하면서 신문 사설도 읽고 책이나 좀 읽고 그런 걸 재미로 알지 . 사람들 찾아오면 만나는 재미로 하는 거예요 . 찾아오던 손님들이 자꾸 세상을 떠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쉽게 놓지는 못하겠어요 .” 가난하게 살다보니 붙들게 된 기술이 이제는 놓을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이 되었다 .
젊은 손으로 가위질을 했고 힘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잘랐다 . 신창섭씨는 까맣던 머리가 흰머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함께 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가 많다 . 이발소의 작은 의자에 앉아 나도 신창섭 어르신을 따라서 창밖을 고요하게 내다봤다 . 이 창으로 사계절을 구경하셨을 게다 .
어르신은 이발소 앞에 꽃과 나무를 심어 놓으셨다 . 목화랑 조롱박도 심어 놓으셨는데 용진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심어 놓으셨단다 . 목화로 실을 뽑고 조롱박으로 바가지를 만들던 시절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 대를 이어 써 내려오던 작은 이발소안에는 미처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
간간히 이발소를 찾는 흰머리 단골손님들에게 신창섭 어르신의 오래된 가윗 소리가 더 오래도록 들려지길 소망한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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