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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0.03.16

아랫지동리 터줏대감의 세상읽기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0.03.16 11:41 조회 1,46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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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보고 느낀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으기 시작했지." - 신지동 마을 최종규 어르신 내가 어디에 있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세상이다 .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길을 걷다가도 스마트폰을 꺼내 찾아보면 된다 . 순간 궁금증은 해결되는데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최종규 어르신의 오래된 집 마루에 앉아 한나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 볼 새도 없이 그저 순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 어르신의 이야기 덕에 집으로 돌아와 나의 오래된 수첩을 꺼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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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 고등학교 시절 빼곡히 적어 놓은 온갖 글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 영화감독 , 영화배우 이름 , 영화제목 들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외웠다 . 토요명화가 시작하면 잽싸게 TV 앞에 앉아 오프닝 화면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읊어대며 가족들 앞에서 잘난 체를 하곤 했다 .

날아가는 생각들을 수첩에 적어 놓기 바빴던 그 시절이 그립다 . 최종규 어르신은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록하고 관찰하고 그것을 모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 - 최종규 어르신이 1964년부터 모아온 책력이다.

용진읍 신지리 신지동마을의 최종규 어르신 (85 세 ) 은 300 년 동안 8 대를 이어 이 마을에서 살고 계신 한마디로 마을의 터줏대감이시다 . 마을이 생겨난 연원과 최씨 , 임씨 , 이씨 등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 된 내력을 어르신은 오롯이 알고 계신다 .

옛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변화를 중요하게 여겨 일 년 동안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일 , 절기 , 기후변동 등을 책으로 엮어 펴냈는데 그것을 책력 ( 冊曆 ) 이라고 한다 . 누적된 기록은 위대한 발견을 낳는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달력도 책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

일 년은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사계절로 이루어지고 1 월부터 12 월까지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간다는 것도 옛 사람들이 오랜 동안 해와 달을 살피고 그 변화를 기록하며 알게 된 것이 아닐까 . “ 아버님 돌아가신지 47 년 되었는데 , 그 당시 책력이라는 게 있어 .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부터 모아오시던 것을 내가 이어서 매년 모으고 있어 . 그거 아무나 못 보는 것이여 . 우리 아버지가 처음 사서 모으던 것이 1964 년이야 . 책력에는 좋은 것은 다 있어 . 농사짓는 사람들은 필수였어 . 아버지 영향을 받기도 했지 . 아버지도 생전에 책을 많이 읽으셨거든 .

그때는 군에 갔다 온 사람 , 한문 아는 사람이 이장을 했어 . 군에서 나오는 공문들이 다 한문이었어 . 그때만 해도 한글도 모르는 판에 한문 아는 사람이 드물었어 . 1950 년 5 월 4 일 졸업을 하고 중학교 다니다가 6,25 가 터지면서 학교를 못 다닌 거야 .

전쟁 통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 학교를 못갔으니 야학교 ( 양당 , 개명학교 라고도 불렸다 ) 에서 공부했지 . 거기서 한문을 알려주던 분이 신가송 선생이었어 .

15 살 이후 23 살 군대 가기 전까지 신가송 선생님 밑에서 한문을 배웠어 .” - 어르신이 스크랩한 신문은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노랗게 바래있다. 어르신께서 읽고 모아두시는 것은 책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책력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셨다면 신문읽기를 통해 세상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접했고 복잡다단한 세상의 흐름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셨다 .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 어르신은 신문을 통해 정치 , 경제 , 사회 , 역사 ,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히셨고 그중 인상적인 지면들은 아홉 권의 스크랩북에 꼼꼼하게 편철되어 있었다 . 1981 년 9 월 5 일부터 시작한 일이다 .

“ 한 권 당 일이 년이 소요되는데 내가 열 권 까지는 만들어놓고 가야지 내가 신문을 60 년 가까이 봤어 . 그런데 보고 내쏘고 내쏘고 하니까 아무 근거가 없는 거야 . 그래서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시작한 거지 . 신문 보고 느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첫 페이지가 일본 침략에 대한 것이었어 . 일본이 우리 나라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이야기로만 들었지 이렇게 자세하게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나니까 아 .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 그 마음으로 시작한 거지 .

신문은 조선일보가 잘 만들기는 해서 오랜 동안 봤는데 작년에 끊었어 . 왜 그런고 하니 너무나 우측으로 치우쳤어 . 정치면은 일절 안 보게 되더라고 . 하지만 사설은 꼭 챙겨봤어 . 그런데 베렸어 . 공정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 .” - 왼쪽페이지 상단의 왼쪽편에 안중근 의사가 보인다.

어르신의 신문 스크랩북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부터 김대중 , 김영삼 , 김종필 같은 오래된 정치인의 사진들이 있었고 이리역 폭발사건 , 88 서울올림픽 , 황영조의 금메달 사진 등 현대사를 수놓은 여러 인물과 사건들이 망라되어 있다 .

어르신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을 외우고 계셨고 케네디와 후르시초프 시절에 냉전시대가 이어진 이유 ,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시절을 거치며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

농사를 지으면서도 스물다섯에 마을 이장을 거쳐 열 가지가 넘는 사회적인 이력을 만들어가며 살아오실 수 있었던 힘은 어쩌면 스스로 배우고 읽고 그것들을 모아두는 오래된 습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

- 2005년 전라감찰사 행렬 재현행사에서 20대 할아버지인 최유경 전라감찰사 역으로 발탁됐던 최종규 어르신. “ 그동안 농사짓고 먹고 살았지 . 인삼재배도 하고 누에도 키우고 젖소도 한 십 년 키웠어 . 지금은 대추농사 지어서 로컬푸드 매장에 납품하지 .

스물다섯 살에 이장 일을 보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 . 신지리 조합장 , 용봉초등학교 육성회장 , 신협 이사장 , 윤강회 회장 , 농촌지도자회장 , 노인회장 , 동악동민기념사업회 용진지국장 , 전라북도 국사편찬위원 같은 일들을 했어 .

내가 외부활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안식구가 고생을 많이 했지 .” 오래된 사진첩에서 본 어르신은 풍채가 참 좋으셨다 .

2005 년 전라감찰사 행렬 재현행사를 했을 때 어르신의 20 대 할아버지인 최유경 전라감찰사 역으로 발탁된 것도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옛 사람들의 호방하고 품격 있는 풍채를 가지셨던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

건강이 나빠지고 네 번의 수술 끝에 살도 많이 빠졌지만 어르신은 두 번째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고맙게 살고 있다고 하셨다 . 어르신의 스크랩북을 다시 훑어보다 정갈한 글씨가 써진 종이를 발견했다 . -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노래말이 적힌 메모지.

“ 아버지 돌아가시고 십년동안 산소들 다녔어 . 댕기다 봉게로 노래를 하나 지어야 겠더라고 . 산소 오가면서 드는 생각을 노래로 만든 거야 .

이렇게 가삿말을 적어 둔 것은 나중에 나 죽으면 산소 비석에 이 가삿말을 새겨 달라고 아이들에게 말을 남겼지 .” 오랜 동안 해와 달을 살피고 그 변화를 기록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담아 써내려간 귀한 가삿말이다 .

『 1 절 : 가로등 달빛 삼아 산행길에 나선 이 마음 어제도 오늘도 어둠을 헤치면서 괴롭다 하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하여 찬바람 무릅쓰고 조각달만 쳐다보며 총총히 걸어가는 고독한 이 마음 2 절 : 가로등 별빛 삼아 하산길에 나선 이 마음 .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괴롭다 하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하여 눈보라 치는 밤에 조각달만 쳐다보며 총총히 걸어가는 고독한 이 마음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아랫지동리 터줏대감의 세상읽기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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