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찬섭이 삼촌 - 구이면 무지마을 구이건강원 산에서도 먹을 것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초등학교 3 학년 때인 거 같다 . 동네 언니 오빠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닐 때 나 좀 데려가라고 울며 따라다녔지만 그들은 홍길동처럼 산으로 사라지곤 했다 .
책가방 매고 유치원생 티를 벗기 시작하니 그들의 일원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 처음 떠난 모험의 장소는 동네 뒷산이었다 . 손에 맞는 작대기를 하나씩 주어들고 괜히 나무들을 툭툭 치고 땅을 파기도 했던 것 같다 .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닌 듯 보였겠지만 우리들에게는 늘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
토끼나 꿩을 잡겠다고 나서 던 길 , 밤을 한 포대 주워오겠다던 날 , 다래를 찾아 떠나는 길 , 그 모든 여정 속에는 꼭 산에서 먹을 것을 주워오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 배를 곯던 시절은 아니었으므로 먹을 것에 대한 맹목적인 끌림은 아니었던 것 같다 .
그 다짐 속에는 동네 어른을 흉내 내는 것 , 그래서 곧 어른이 될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역할놀이였던 것 같다 . 누구네 아빠가 산에서 영지버섯 , 싸리버섯 , 능이버섯 등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따와 마을사람 모이는 곳에 내어 놓고 모험담을 늘어놓던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
어른들 틈에 끼어 그 대단한 전리품을 보며 우리들은 늘 다짐을 했다 . 우리도 산에 가서 대단한 먹을 것을 따오자 ! 유압기에서 칡즙을 짜내고 있는 찬섭씨. 박찬섭씨는 고향을 떠나 한창 때를 도시에서 보내고 사십이 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그의 동네뒷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쉰 넷인 지금의 그에게는 야트막한 언덕이 된 그곳 . 산과 땅에서 먹을 것을 거둬먹던 기억은 도시를 떠돌아 다녔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
돌아온 고향에서 박찬섭씨는 작은 건강원을 운영하며 틈틈이 농사를 짓고 겨울철이 되면 산에서 약초와 칡을 캔다 . 짜내고 남은 칡 찌거기(섬유질)는 주변 사슴농장 사료로 보내지고 농사지을 때 거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 칡에 대한 첫 기억은 어릴 때 동네 형들 따라다니면서 칡 캐러 갔던 거지 .
그 시절에는 나무도 없던 민둥산이었으니까 칡 같은 것도 많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그 한 토막 얻어먹으려고 욕봤지 . 동네 꼬마들이 다 형들 뒤꽁무니 쫄쫄 따라다니면서 칡 한 토막 얻어먹으려고 . 그때는 간식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 그때 기억에 칡이 지금처럼 크고 굵지 않았던 거 같아요 .
워낙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니 사람들이 산에 가서 이것저것 캐느라 뿌리가 클 세가 없었지 .” 넉넉지 않은 집의 구남매 중 여섯째였던 박찬섭씨 . 어린 시절 기억은 일 안하려도 도망 다닌 기억밖에 없다며 웃어넘긴다 . 그는 무조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다 .
아버지 몰래 공업고등학교를 간 것도 그 이유이다 . “ 농사짓기 싫더라고요 . 아버지는 농업고등학교 가라고 했는데 나는 공고를 가버렸지 . 기술 배워서 일찍 고향 떠나 살려고 . 새벽 6 시에 첫차를 타고 두 시간씩 걸려 학교를 악착같이 다녔네 .
졸업 후에는 서울 올라가서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취직해서 일만 했지 뭐 . IMF 터지기 3 년 전에 전주로 내려왔는데 , 여기에서도 플라스틱 사출 일을 했지 . 모나미볼펜 깍대기 만드는 거 . 회사가 부도가 나고 잠시 쉬고 있다가 . 공조닥트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일 맡아서 했지요 .
내가 마음에 들었는가 계속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 그 당시 팔복동 공단 있는데서 12 년은 그 일을 했는가봐 . 젊은 시절을 떠돌이 생활로 보냈지 . 그러다가 전세로 살고 있던 집이 소방도로난다고 나가라고 그러더라고 . 그래서 구이 어머니 집에 들어오게 된 거지 .
고향집에 와서도 출퇴근하면서 닥트 일을 2~3 년 했지 . 집구해지면 다시 나가야지 했는데 , 늙어가는 홀어머니 보니까 또 못나가겠더라고 . 그래서 그냥 눌러 앉게 된 거지요 .” 고향 무지마을 앞 도로변 건강원을 인수해 10 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
그 옆 미용실가게도 사무실로 쓸 겸 임대했는데 사무실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 동네 형님 , 어르신들이 때 되면 오토바이 타고 , 전동차 타고 ‘ 돌아 온 찬섭이네 ’ 공간에 모이는 것이다 . 점 백원 화투도 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
요즘 같은 겨울철 박찬섭씨는 하루 종일 칡과 사투를 벌인다 . 직접 캐온 칡 , 사람들이 캐 온 칡들이 건강원 한 쪽에 잔득 쌓여 있다 . 고압기로 물을 뿌려 칡 표면에 묻은 흙을 제거 한다 . 그 다음 어른 다리 한 쪽 크기의 칡을 작두로 썰어낸다 .
칡 토막들은 바로 믹서기로 들어가 갈아져 나온다 . 갈아져 나온 것을 유압기에 넣고 짜내면 칡 원액이 나오다 . 그렇게 나온 칡 원액이 향긋하고 맛은 좋지만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살균을 해야 한다 . 중탕기에 넣고 열처리를 하고 식힌 후 한번 씩 먹을 양 만큼 포에 담아내고 박스에 포장을 한다 .
이 모든 일을 박찬섭씨 혼자 한다 . “ 노가다 할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요 . 칡은 처음 캐러 다닐 때가 힘들지 몇 번 캐 버릇 해보면 요령이 생겨서 쉽게 해요 . 괭이 삽 낫 톱 맬빵 . 이것이 칡 캘 때 가지고 다니는 도구에요 . 약초꾼들은 보통 장화를 신어요 .
뱀 때문에도 그렇고 산 다니다보면 습지 같은 곳도 있고 계곡도 훑고 다녀야 하니까 전천후 신발이지 . 칡 캐는 건 일도 아니여 . 매고 내려오는 게 힘들지 . 맬빵으로 잘 감아서 들쳐 맸을 때 50kg 정도는 거뜬히 들지 . 100kg 정도는 캐야 나간 보람이 있어요 .
이쪽에서는 순창 동계 쪽에서 많이 캐요 . 그 쪽 칡이 맛이 좋아요 . 땅이 좋아야 하거든요 . 황토 마사 땅이 그쪽에 많아요 . 흙이 좋으니까 잘 캐지기도 하고 . 칡들이 작아 보여도 보통 5 년은 된 것들이고 다리 굵기 만하게 굵고 긴 것은 보통 10 년이 넘었다고 봐야지 .
12 월부터 4 월초까지만 캐요 . 겨울에만 칡을 캐는데 칡 맛 좋거든 . 여름에 캐면 물이 많아서 싱겁거든요 . 그래서 쓴맛이 강하게 나는데 겨울에 캔 칡은 쓴맛이 나면서 뒷맛이 달죠 .” 칡캐러 갈때 들고 가는 삽과 곡괭이.
막대기 하나 들고 칡 한 토막 얻어먹으러 형님들 뒤를 따라다녔던 시절은 지났다 . 박찬섭씨에게 건강원 일과 농사는 벌어먹고 사는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 그가 이 일에 재미를 붙인 것도 어떤 형님 덕분이다 . “ 건강원일 처음 배울 때 8 개월 정도 친구랑 같이 다른 건강원을 했었지 .
그때 산에서 뭘 캐서 가져다주는 형님이 있었지 . 그 형님이 네 살 위인데 , 나는 사부님이라고 불러요 . 그 사부 따라 한 2 년 정도 진안 장수 쪽 산 따라 다녔나 봐요 . 사부 따라다니면서 약초 , 버섯 공부 많이 했지 . 처음에는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안 보여 . 이 앞에 놓고도 못 캐 .
근데 5 미터 뒤에 있던 사부는 그걸 보고 와서 캐 . 근데 한 번 캐고 나면 그때부터 보여요 . 산을 따라다니면서 요령도 있고 보는 눈도 있어야 캐져 .” 내가 알고 하는 것과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 지금껏 살아오며 여러 사부를 만났고 지금은 자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짓다보니 열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고 배추 , 옥수수 , 감자 , 고구마 키우는 농사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박찬섭씨는 쑥스럽게 웃어넘긴다 .
“ 농사가 싫어서 고향 떠났는데 지금은 내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있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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