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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17.07.03

궁극의 한 그릇, 백여사네 국밥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17.07.03 12:46 조회 1,7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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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한 그릇 , 백여사네 국밥 백영자 , 유균형 부부 이십여 년 전 삼백번 버스를 타고 고산으로 향하던 여인이 있었다 . 서른의 끝 무렵이었다 . 지금은 전주와 고산을 오가는 버스가 두 대로 늘어났고 배차시간도 15 분에 한 대꼴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루에 네다섯 대만 오갔을 뿐이다 .

큰 길이 뚫리기 전이어서 버스로 고산 가는 길은 멀고 아득한 길이었다 .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그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창밖으로 바라본 낯선 풍경은 어땠을까 . 아무 연고도 없는 길로 무작정 뛰어든 그때 그 당시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개진다 .

집 앞마당 접시꽃 앞에서 (2)
집 앞마당 접시꽃 앞에서 (2)

낯선 땅에서 시작한 국밥집 이십여 년 전의 그 여인은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 낯선 고산을 떠나지 않고 살았더니 그에게는 ‘ 백 여사 ’ 라는 멋진 별명이 생겼다 . 고산바닥에서는 국밥집 사장님으로 유명한 백 여사 , 백영자씨는 이십년 째 돼지머리 , 내장 삶아 국밥을 팔고 있다 .

백여사 국밥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 젊은 여자라고 우습게 보일까봐 일부러 사납게 보이려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눈썹도 까맣게 문신하던 시절이 지냈고 지금은 여사님에 걸 맞는 나이가 되었다 . 밥은 많이 안 먹고 술만 먹는 단골들에게는 ‘ 야 이놈아 . 술 좀 작작 마셔라 .

몸 상한다 .’ 톡 소는 입담은 국밥 한 그릇에 딸려오는 맛난 반찬 같은 것이다 . 국밥집 이십년 만에 땅도 생기고 집도 지었다 .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 여한이 없다고 하지만 옛날이야기를 할 때는 다시 서른아홉 순한 백영자가 된다 . 그때 많이 울었건만 여전히 눈물이 남아 있다 .

“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딱 맞네 . 우리 아저씨랑 나는 고향이 임실이야 . 살기는 전주에서 자식들 낳고 오래 살았고 . 아무 연고도 없는 고산은 어찌 알게 되었냐면 친구들이랑 기름 짜러 한 3 년은 왔다갔다 했었지 . 오뚜기 기름집으로 들기름 짜러 1 년에 두 번은 왔었어 .

전주보다 좀 싸게 짜줬지 . 그때도 기름 짜는 거 기다리면서 옆에 분식집에서 순대를 시켜서 먹다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 우리 애들이 넷인데 키우고 가르치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 그 당시 우리 아저씨가 버스 운전을 했었거든 .

그래도 우리 아저씨 혼자 벌어서는 못 사는데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름집 주인이 그러네 , 언니 뭐 할라고 ? 내 친구가 저쪽에서 순대국밥집을 하는데 신랑이 갑자기 죽어서 가게를 내놓는다네 . 그 소리를 듣고는 어느 날 하루 날을 잡고 나 혼자 버스를 타고 조용히 가봤네 .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와봤지 .” 국밥을 옮기고 있는 백영자씨 남편 유균형 (65 세 ) 씨는 버스운전 때문에 주로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고 백영자씨는 전북대 앞에서 노점을 13 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 열심히 일했지만 사글세방 연탄창고에 연탄은 도무지 가득 채워지질 않았다 .

전주의 가겟세는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던 찰나 고산에 자리가 났다던 순대국밥집을 덜컥 계약한 것이다 . “ 우리 아저씨 몰래 계약한 거야 . 무서운 지도 모르고 통머리를 썼지 . 그 당시는 일단 벌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어떻게는 빚을 얻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

제 정신이 아니었어 . 그때는 .” 텃세가 맵긴 맵더라 전주보다 가겟세가 싸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큰돈을 빌려 가게보증금을 냈기 때문에 어깨의 짐이 만만치 않았다 . 빚을 낸 부담감은 제쳐두고라도 처음 몇 년은 텃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

누군가에게 고산은 따뜻한 고향이었겠지만 백영자 , 유균형씨에게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객지였다 . “ 누가 그러더라고 고산이 까시런 곳이어서 웬만하면 장사하기 어렵다고 . 우리 아저씨가 배달 다니면서 싸움도 퍽이나 했지 .

아저씨가 목수로 30 년 넘게 일한 기술자고 버스운전 하면서 남 밑에서 일하던 사람은 아닌데 , 넘 안방까지 뚝배기 배달을 다니니 오죽했겠어 . 그때 돈도 퍽이나 많이 떼였어 . 타지에서 왔다고 만만하게 보고 . 3~4 년간은 울고 살았어 . 근데 동네 미용실 동생 한 마디에 묘하게 힘이 나더라고 .

그 동생이 그랴 . 언니 , 울지 말고 손님 하나라도 오면 반찬 맛있게 해서 손님을 잡아 . 여기서 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 한번 온 손님을 두 번 오게 만들어 .” 국밥에 들어갈 고기를 썰고 있는 남편 유균형씨 딸 은숙, 성아씨와 함께 가게일을 돌보고 있다.

백영자씨는 밤인지 낮인지 모르게 고기를 삶아 국밥을 만들고 유균형씨는 오토바이 한 대로 완주 6 개 면을 돌며 국밥배달을 했다 . 90 년에서 2000 년대 초반에는 고산읍내에 사람이 넘쳐났다고 한다 .

차가 많이 없던 시절이어서 화산 , 경천 , 비봉 , 동산면 등지의 사람들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고산에서 여흥을 즐기고 가던 시절이었다 . 밤 12 시는 기본이고 새벽 6 시까지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갔다고 한다 . “ 그때는 진짜 사람이 많았어 . 사람들이 다 고산바닥에 모였지 .

저녁 내 장사를 하고 밤 11 시 ~12 시에 김치를 담아 . 그리고 삶은 고기를 썰지 . 그때는 칼자루 들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자다가 일어나서 고기 썰고 그랬지 . 그렇게 20 년을 죽기 살기로 하니까 이 땅을 얻게 되더라 . 집도 짓고 . 넘들 쉴 때 쉬면 돈은 못 벌었지 .

평균적으로 5 시간을 못 잤어 . 넘 잘 때 일을 해야지 .” 집 근처 텃밭과 논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쌀을 식재료로 쓰고 고기도 직접 삶고 손질을 한다 . 삶은 고기에서 불순물과 비계를 적당히 제거해 줘야 국물 맛이 깔끔하고 깊어진다 .

정성껏 국밥을 끓여서 우리 가족들 먹는 것처럼 김치 담고 반찬 만들어서 손님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 10 년 전부터 일손을 거들던 큰 딸 유은숙 (40 세 ) 씨를 필두로 둘째 유성아 (38 세 ), 막내 유무근 (35 세 ) 씨가 가게일은 함께 하고 있다 .

식구가 함께 하는 국밥집어서 그런지 , 가게에 들어서면 친척집에 놀러온 기분도 든다 . 잘 자라난 자식들 덕에 유균형 , 백영자씨 부부에게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 . 딱 3 년만 하고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하신다 . “ 후회는 안 해 .

옛날에는 영부인들처럼 높은 사람한테 여사님이라고 불러줬지 , 나같이 못 배운 사람한테 누가 여사님이라고 불러줬겠어 . 국밥집 하니까 사람들이 백여사 ~ 백여사 불러 주고 , 그 소리 들을 때 행복하지 .” 먹을 때는 국밥처럼 간단한 것이 없다 .

밥 한 그릇 말아서 후루룩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든든하다 . 먹는 것은 간단하지만 만드는 것은 고생스럽다 . 궁극의 한 그릇 . 그 속에 백 여사의 뜨끈한 인생이 담겨있다 . 왼쪽부터 유균형, 백영자, 큰딸 유은숙, 둘째딸 유성아, 유성아씨의 딸

현장 사진

궁극의 한 그릇, 백여사네 국밥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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