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진 팔뚝과 단단한 손의 이력
- 화산면 죽동마을 유미 씨 이야기
어디에서든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사람이 있다. 으스대지 않고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어려움 있는 곳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성큼 다가가는 사람. 이렇게 자신을 표현한 글을 읽고 있을 유 미(1962년 생)씨의 표정이 떠오른다. 손사래를 치며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얼굴을 가리고 수줍게 웃고 있을 모습.
화산면 죽동마을 초입에 있는 첫 번째 집이 유미씨의 집이다. 10년 전 화산면으로 귀촌해 지금의 터에 소박한 집을 지었다. 도시의 독립적인 공간에서 살던 이들이 터를 잡아 살기에 부담스러운 자리일 수도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오고 가며 보는 곳, 담장도 없이 앞마당을 훤히 드러난 집이지만 유미씨는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마당 한쪽에 비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지붕을 만들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쉴 수 있는 긴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다. 언제든 드나들어 차를 타 마시거나 간단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버너, 주전자, 식기들이 놓여져 있는 이 공간을 동네 사람들은 ‘쉼터’라고 부른다.
이른 새벽에 호미 하나 들고 밭으로 나가 늦은 저녁까지도 호미를 놓지 않는 유미씨를 동네사람들은 ‘황소’라고 부른다.
“남편은 여기다 잔디 심고 꽃 심고 좀 꾸미고 싶었는데 나는 잔디는 소용없다, 땅이 아까워서 뭐라도 하나 더 심으려고 그랬죠. 땅을 일구고 사는 어린 시절 꿈을 드디어 이루게 된 거잖아요. 처음 귀촌해서는 밤 12시까지 밭에 나가 일했어요. 여기 길가 가로등 불이 환하게 켜지거든요. 그러니까 양파 같은 거 신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했죠. 이장님 부부가 오다가다 보면 황소같이 일한다고, 당신같은 귀촌인은 처음 본다고 그래요. 제가 일 욕심이 많아요.”
노는 것보다 농사를 좋아하던 괴짜 어린이
유미씨는 어머니의 고향인 전북 고창 바닷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남의 일 돕는다고 탈곡기를 돌리다가 발에 상처가 났는데 치료도 못 해보고 파상풍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스무 살이 되어서야 만난 고모들은 ‘지 아비를 똑 닮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유미씨는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를 닮아 농사일을 좋아하고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제가 시골 일을 엄청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다닐 때도 등교 전에 밭일하고 학교 가면 밭일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희한하지. 어른들이 같이 품앗이 하자고 할 정도로 일을 엄청 잘 하고 좋아했어요. 할머니 따라서 밭에 가서 호미로 풀을 뽑고 고구마, 콩 농사도 짓고 벼농사도 짓고. 그게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놀이였던 거 같아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게 살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그리움 같은 게 있었죠. 할아버지가 엄마를 멀리 안 보내시고 한 동네에다가 재혼시켰어요.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피해다니고 안 본 거 같아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엄마가 재혼해서 낳은 동생들한테 항상 큰 언니한테 잘해야 된다는 말을 하셨데요.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모시다가 하늘로 보내드렸죠. 아무튼 어린 시절 외롭고 그리운 마음을 밭에 나가서 풀었던 거 같아요.”
타인을 돌보는 삶의 시작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틈틈이 교회 봉사활동을 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23살에 결혼을 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직업 특성상 잦은 발령으로 울산, 울진, 영광 등 바닷가로 이주하며 살던 유미씨는 좋아하던 농사를 지속할 순 없었지만 그 지역의 교회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 어린 시절이 평범하진 않았잖아요. 엄마 아빠 없이 외로웠던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란 것이,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 같아요. 풍족하게만 자랐더라면 타인을 잘 돌보지 못했을 거 같아요.”
화산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여동생 덕에 화산면이 낯설지는 않았다. 화산으로 이주한 지 3년 동안은 집 근처 밭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회관에 모여 어르신들하고만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또래 친구들보다는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한 유미씨였다.
“마을회관에 놀러 가서 음식 해서 먹고 어른들하고 저녁에 화투도 치고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나니 저를 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는 느낌이었죠.”
마을에서 발을 넓혀 교회를 다니며 화산면의 어려운 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화산면 농협에서 주관하는 농가주부모임활동으로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돕기도 하며 지역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완주노인복지센터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생활지원사로 활동 중이다. 유미씨는 정해진 업무 외에도 지역의 봉사단체 3040청년회와 협업하여 요리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의 어르신들을 배려해 직접 조리부터 배달까지 하고 있다.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던 유미씨는 올해 봄, 전라북도 도지사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쑥스러워서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가족들의 조용한 축하만 받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교회갔다가 5시에는 밭으로 가요. 풀 뽑고 열매도 따고. 여기가 길가여서 어르신들이 보니까 더 열심히 풀 뽑고 가꾸는 거죠. 제가 죽동마을 노인회에 총무를 맡았거든요. 그래서 어른신들 살림을 제가 해요. 그리고 저희가 올해 마을 가꾸는 사업을 하나 따냈어요. 쟁쟁한 마을이 10군데 넘게 신청했어요. 3개 마을만 선정했는데 우리 마을이 되었어요. 마을 돌담도 쌓고 장마철 하천 범람위험이 있어서 보수공사도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둘레길 조성이에요. 우리 마을 앞이 바로 도로여서 어른들이 이 마을 찻길로 계속 다니시는 거예요. 차가 쌩쌩 달리는데 위험하니까 하천으로 둘레길을 조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꽃도 심어놓고 걷다가 힘드니까 벤치도 놓고 비가림 시설도 할 거에요. 가을 쯤 되면 완성이 될 것 같아요.”
유미씨의 다부진 팔뚝과 단단한 손이 그가 살아온 인생을 말해준다.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호미를 들고 땅에서 놀았다. 그 손으로 흙을 만지고 심고 정직하게 열매를 거둬들였다. 땅이 허기진 유미씨를 달래주는 벗이었고 단단해진 유미씨는 이제 기꺼이 어르신들의 벗이 되고 싶다고 한다.
/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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