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 엄목마을 김영중 어르신 이야기

17살 무렵 직접 써내려간 주역을 펼쳐들고 있는 김영중 어르신.jpg
엄목다리 개통식에 모인 마을 사람들 (3).jpg
40대부터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행유록. 늘 그렇듯 저녁 7시무렵이 되면 낮은 탁자에 앉아 일기를 쓴다  (2).jpg
50대 무렵 문방구를 넣어두기 위해 직접 만든 쾌상.jpg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

- 운주 엄목마을 김영중 어르신 이야기

 


엄목마을 앞에 흐르는 천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이 물길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변함없이 살아가는 그 천을 바라본다. 물길도 그대로, 천등산의 능선도 그대로건만 다부졌던 청년은 여든 노인이 되었다. 늘 변함없을 것만 같던 물길은 여름만 되면 폭우를 만나 거칠어졌다. 김영중(1946년생) 어르신은 여름 장마철 큰물로 발길이 막혔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기필코 마을 앞에 큰 다리를 놓아야겠다고 결심하던 순간이었다. 군 제대 후 엄목마을의 이장이 된 그는 1978년에 그 결심을 이루었다. 그 당시 지역 신문에 그가 기고한 글을 옮긴다.

 

196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해 큰비가 내렸고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장선천에 큰 물이 흘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 내를, 옷을 벗고 위험을 무릅써가며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선천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스럽게 생각해 왔지만 그 해 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장선천을 건너 모내기를 하고 오던 마을 주민 30여명이 한꺼번에 물에 떠내려간 것이다. 천명이라 할까. 다행히도 한 사람의 익사자도 없이 헤엄쳐 나오긴 했으나 언제 사고가 또 있을는지 모르는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장선천을 건너 3킬로나 떨어져 있는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볼 때 이곳에 기필코 다리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문이 제일인 줄 알고 살아왔지

김영중 어르신의 아버지(김개동)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어깨 너머 천자문을 깨우쳤다. 오로지 한문을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하고 대우받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 이였다. 엄한 아버지 말을 잘 따르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엄목서당에서 10년 동안 한문을 배웠다. 명심보감, 통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를 배우는 동안 15명의 동급생들은 다 떠나고 혼자만 남아 공부를 하며 십대 시절을 보냈다. 스승님이 아끼는 유일한 제자였다.

 

스승님이 어느 날은 나보고 중용을 배우라고 그러셔. 중용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중심 잡는 거야. 그런데 책을 살 돈이 없었지. 그래서 동네에서 숯장사하는 분을 따라다녔지. 우리 동네에서 30리 길을 가서 숯을 굽는데, 그 당시는 숯장사가 불법이었어. 경찰한테 뺏기니까 밤에 지게에 짊어지고 오는 거야. 눈을 피해 길도 없는 곳을 헤쳐가면서 오는 거지. 지게에 숯 10관을 짊어지고 오는데 계속 걷다 보니 나중에는 발도 안 떨어지고, 겨울인데도 땀이 나서 등허리에 소금이 허옇게 맺혀. 그렇게 숯을 팔아서 중용이라는 책을 샀지. 귀한 책이었지. 그렇게 여러 공부를 깨우친 거지.”

 

중용을 배우며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를 배운 그는 한문 덕에 이날까지 대우받으며 살아온 것 같다고 한다. 한자를 모르는 이웃들을 대신해 여러 문서들을 처리해주기도 하고 어린 시절 스승님에게 배운 풍수지리로 마을 지관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이장의 푸른 꿈

김영중 어르신은 미 육군 제7보병사단에 입대해 DMZ수색대로 복무하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밥때마다 나오는 고기와 쌉싸름한 맥주의 맛은 지금 생각해도 극락같은 맛이라고 그때를 떠올린다. 선임하사로부터 카츄사 킴은 넘버원 카츄사!’라는 찬사를 듣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한 살 어린 신부와 식을 올리고 농군의 삶을 살았다. 논농사만 짓던 그 시절에 다소 생소한 작물이었던 딸기와 취나물 농사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때였다.

 

제대하고 막 나왔을 때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면직원이 찾아와서 이장하라고 그랴. 면장실로 나를 끌고 가다시피해서 면장 앞에서 차렷경례를 시키네. 그렇게 이장일을 본 거지. 나 이장할 때 최고 큰 사업이 뭐였냐면 마을 앞 냇가에 다리 놓은 거였어.

그 당시 관급자재로 시멘트하고 철근은 관에서 사줬지. 그해 630일이 준공일이었는데 그 전 1223일부터 동네 사람들이 앞에 냇가에서 모래를 채취하기 시작했지. 사람들이 부역을 나와서 조를 짜서 일을 한 거지.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놓은 다리라고 봐야지. 다리 개통되었을 때 그때 기분이 진짜 좋았어. 다리 위에서 고사도 지내고 풍악을 울리고 시끌벅쩍했지. 다리 개통식을 하고 한 3일 후에 비가 부실부실 오기 시작하더니 마치 다리를 시험하는 것 마냥, 다리 바로 밑에까지 냇가 물이 차서 흘러가네. 옛날 같으면 다 쓸려 내려가니까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텐데 끄떡없는 다리 위에서 그 물을 보니까 참 대단하데.”

 

변함없이 늘 주변을 돌보는 사람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는 말이 있다.

김영중 어르신은 명심보감, 통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와 같은 고전들을 평생 몸에 익히며 살아왔다. 한 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깊이 새기고자 반복해서 읽고 쓴다.

매주 금요일이면 고산향교에서 한문을 공부하는 노년의 유림이자 하루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정성스러운 기록가이다.

그의 작고 낮은 탁자에는 종이를 편철하여 직접 만든 낡은 책들이 쌓여 있다. 17살 무렵 먹을 갈아 붓으로 한자 한자 써내려간 주역은 지금도 생각나면 펼쳐보는 책이다. 낡은 서류봉튜를 재활용해 편철한 노트 표지에는 행유록行流錄이라 써있다.

 

사십대부터 쓰기 시작했지. 그저 하루의 지난날을 기록한 거야. 나는 어두운 세상을 사는 거야. 누가 요즘 이런 것을 쓰겄어요? 그냥 낙으로. 둔해지고 정신이 흐려지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쓰는 거야. 저녁 7시나 8시쯤 이 자리에 앉아서 먹을 갈고 붓으로 써내려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군자지도(君子之道)라 하여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마음을 자꾸 씻어내려. 그래야 몸을 지키는 거야. 고약한 마음, 나쁜 마음을 얼른 씻어내고 몸을 바르게, 행동을 바르게, 양심을 바르게. 그거지 뭐, 다른 것 있가니.”

 

김영중 어르신 댁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냇가로 다시 걸어갔다. 몇 해 전 새로 만들어졌다는 엄목마을 다리 앞에 서 본다. 노후화된 옛날 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옛날 다리 위에서 풍악을 울리며 고사를 지내던 사진은 생생하다. 다리 개통식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마을의 제일 연장자이신 95세 어르신이 다리 입구에서 끝까지 무사히 걸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 꽹과리 소리, 아낙들의 덩실덩실 춤사위 너머 천등산의 능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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