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 머스매가 토끼어매, 염생이 할매가 되기까지
- 고산면 어우리 이인수 할머니 이야기
이인수 할머니는 1941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여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이름을 잃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매’로 불렸다.
유년 시절에는 비교적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원치 않은 결혼 이후 험한 노동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이인수 할머니가 30~40대에 걸쳐 얻게 된 별칭들은 조금 특별하다.
‘서북머스매, 꽃집각시, 소어매, 돼지어매, 토끼어매.’ 그 이름들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여성이 자신의 노동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삶의 지층이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움 속에서도, 그는 마당 가득 꽃씨를 뿌려 고운 꽃을 피워내던 꽃집 각시였고 손이 닿는 대로 가축을 돌보며 밥을 먹이는 소어매, 돼지어매, 토끼어매였다. 그 수를 불려 가축을 팔아 돈을 벌면 무조건 땅을 샀다.
몸은 힘들었지만, 일할 때만큼은 시댁 식구들의 눈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에, 그 시절은 힘들면서도 묘하게 신이 났다.
“서북 머스매는 남자들이 하는 험한 일 한다고 붙은 별명이야. 내가 살던 곳을 서북이라 불렀거든. 서북 산다고 서북머스매라고 불렀지. 내가 어려서부터 근력이 좋았어. 어디 일하러 가도 나는 남자 일을 하니까 품삯을 두 배로 줘. 내가 일을 잘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서북머스매야, 우리집 일 좀 해줘라’ 나만 찾았지. 보통 여자들은 아이 이름 따서 누구 어매 그렇게 부르는데 사람들은 나는 그렇게 안 불렀어. 내가 이 집으로 시집와서 손만 대면 다 잘 됐어요. 농사도 잘되고 가축들도 먹이면 자꾸 불어나고. 동네 사람들이 저 집에 며느리 잘 들어왔다고 새색시 복이 있다고 그랬지. 그런데 나는 시집살이로 고생했어.”
좋아하던 노래를 숨겨야 했던 시절
전주 이씨, 세종대왕 18대손이라는 사실은 이인순 할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자랑이기보다 짐에 가까웠다. 어른들이 말하는 ‘이름값’은 늘 무겁게 어깨를 눌렀고, 그 속에서 할머니는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야 했다.
“양반이네 왕손인이네 찾아가며 어렸을 때부터 억압받으며 자랐지. 우리 어머니 엄하기가 인왕산호랭이보다 더 무서워. 내 고향 큰 동네에서 전주 이씨 중에서 우리 집이 최고 촌수가 높아. 명절 때 되면 머리 하얀 할아버지들이 도포자락에 갓 갖추고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훨씬 젊은 데도 절을 하는 거야. 쬐깐했을 때는 왜 할아버지들이 젊은 사람한테 절을 하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려서부터 누가 노래하면 가만히 듣다가 벌써 머릿속에 가사가 들어가 있어. 잔칫집에서 들은 노래를 기억했다가 막대기를 이렇게 두들겨 가며 노래를 불러. 그럼 우리 어머니가 방맹이 들고 쫓아다니면서 기생될라냐고 난리 치고 그랬어. 나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죽는 시늉까지 다 했어.”
고향 마을 눈 닿는 곳마다 집안의 땅이었다. 그러나 큰오빠의 노름빚을 갚느라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열두 살이던 이인수 할머니는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서울로 향하게 된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친어머니의 지인은 “형님, 막내딸은 머리도 좋고 총명하게 생겼으니 제가 끝까지 가르치고 시집보내겠습니다. 수양딸로 삼게 해주세요.”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건설업으로 크게 성공한 양부모 밑에서 곱게 자랐지만, 열일곱 살 무렵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아이들 사이에서 양갈래로 머리를 곱게 땋고 고급스러운 옷과 구두를 신은 아이는 어쩌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학교 친구들의 끊임없는 괴롭힘 속에서 더는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후 약사로 일하던 언니를 도와 약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 사진 속의 이인수 할머니 얼굴은 배우 엄앵란을 닮아 있었다. 기품 있는 외모 덕에 내로라하는 기업가의 자녀들이 구애를 해왔지만,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덜컥 겁이 났다”고 회상했다.
“똑똑히 배웠으면 시집간다고 했을 텐데 내가 공부를 하다 말았잖아. 모른다고 구박할까 봐 두려웠지. 서로 나 달라고 머슴마들이 쫓아다니는데 징그러 죽을 뻔했어. 그래서 고향집으로 도망 온 거여. 친정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스무 살에 이웃 마을 남자와 결혼했지.”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거셌고, 그로 인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 남편이 하도 험하게 굴자, 동네 사람들은 “서북머스매, 그 힘 뒀다 뭐 할래? 그 신랑 번쩍 들어서 내던져 버려!”하며 할머니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보다 못한 사촌 동서가 “그렇게 살다 간 정말 죽겠다” 싶었는지 전북 부안에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할머니는 마침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지뜸 깡패에서 염생이 할매가 되기까지
“그 뒤로 봉동 추동마을로 이사를 온 거야. 3~4년 살다가 쉰 살 무렵 양야리 산 꼭대기로 이사 가서 150평 사서 오막살이 집 짓고 양계장을 했지. 그런데 여자 혼자 산다고 남자들이 깔봐. 싸우는 기술만 늘었지. 멱살 쥘 때 손을 위에서 아랫방향으로 잡고 비틀어서 쥐어. 확 댕겨보면 감이 와. 들을 것 같으면 쥔 채로 치대버리고. 못 든다 싶으면 발로 아랫도리를 죽지 않을 만큼만 탁 차버려요. 혼자 살다 보니 왈패가 된 거지. 얌전한 채로 살면 나를 못 지켜. 여기 살다보니 또 별명이 생겼어. 양지뜸(양야리의 옛지명)깡패라고!”
양야리 살던 시절 할머니의 목소리를 알아본 이장님의 추천으로 면민의 날 노래자랑에 나가 민요를 불러 TV를 상품으로 받았다. 이후 완주군장애인복지관을 오가며 노래할 무대가 많아지자, 할머니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천안 삼거리'부터 '풍년가', '뱃노래', '아리랑'까지, 온갖 민요를 구성지게 뽑아냈다. 친딸처럼 따르던 장애인복지관 직원의 권유로 2022년 전국노래자랑에 나갔고 할머니는 평생 길러 온 가축들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 '인기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염생이 할매'로 불리게 되었다.
서북머스매, 꽃집각시, 소어매, 돼지어매, 토끼어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양지뜸 깡패가 되었고 지금은 염생이 할매가 되었다. 이인수 할머니는 노래를 잊고 살다가 뒤늦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 때갈때갈하면서도 구슬프고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주저 없이 노래한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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